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정진규(1939~ )

남들도 다 그런다하기 새 집 한 채를 고향에 마련할 요량으로 그림을 그려가다가 늙은 아내도 동참시켜 원하는 걸 그려보라 했더니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와 원추리랑 채송화가 피는 장독대가 있는 집이면 되었다고 했다 남들이 탐하지 않도록 눈에 뜨이지 않게만 하라고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實用도 끝이 있구나! 나는 놀랐다 내 텅빈 實用 때문에 텅빈을 채우려고 육십평생을 소진했구나 아내의 實用이 바뀌었구나 눈물이 한참 났다 이제서야 사람 노릇 좀 한 번 하려고 實用 한 번 하려고 나는 實用의 그림들을 잔뜩 그려 넣었는데 없는 實用의 實用을 아내가 터득했구나 눈에 뜨이지 않게 까지 알아버리다니 다 지웠구나 나는 아직 그냥 그탕인데 마침내 一字無識으로 빈 하늘에 걸린 아내의 빨랫줄이여! 구름도 탁탁 물기 털어 제 몸 내다 말리는구나 염치없음이여, 조금 짐작하기 시작한 나의 일자무식도 거기 가서 잠시 끼어들었다 염치없음이여, 또다시 끼어드는 나의 一生이여 원추리 핀다 채송화 핀다

-『사물들의 큰언니』, 책만드는집, 2011.

사람들은 마음의 집 한 채씩 설계하며 산다. 젊어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집을 꿈꾸지만 나이가 들면 소박한 집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이 시의 화자도 고향에 집 한 채 짓고 살려고 한다. 평생 고생시킨 아내에게 미안해서 그 집에 아내의 생각도 반영하려고 어떤 집이 좋으냐고 묻는다. 아내의 대답에서 화자는 깨달음을 얻는다.

'눈에 뜨이지 않게'가 아내의 대답이다. 아내는 진정 실용적인 집, 가장 편하게 살 수 있는 집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유식한 화자는 굽은 소나무가 잘 자란 소나무보다 편하게 그리고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내의 깨달음에는 미치지 못했음을 아내의 한 마디에서 깨닫는다.

화자는 늘 그냥 평범한 여자로 알아온 아내를 새롭게 인식한다. '마침내 一字無識으로 빈 하늘에 걸린 아내의 빨랫줄이여'라고 감탄한다. 아내의 지혜를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에 비유한 것이 이 시를 빛나게 한다.

시인

최신 기사

mWiz
18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조국을 향해 반박하며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윤석열 검찰총장과 정경심 기소에 대해 논의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
LG에너지솔루션의 포드와의 대형 전기차 배터리 계약 해지가 이차전지 업종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주요 기업들의 주가가 하락세를 보이고 있...
방송인 유재석은 조세호가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 하차한 사실을 알리며 아쉬움을 표했으며, 조세호는 조직폭력배와의 친분 의혹으로 두 프로그램...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