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풍류산하] 시인 백석의 첫사랑

남자는 첫사랑을, 여자는 마지막 사랑을 잊지 못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이 첫 남자이길 원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이 마지막 여자이길 원한다. 남자는 첫사랑에게 마음의 100을 주고 헤어질 때는 50을 회수한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랑에게 남은 50을 주고 이별할 때 그 절반인 25를 가져온다. 반면에 여자는 첫사랑에게 100을 주고 헤어질 때도 100을 되받아 온다. 두 번째도 100을 주고 100을 챙긴다. 그렇지만 애증의 그림자는 짙게 남는다.

첫사랑은 무엇인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도시 소녀가 열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소년에게 업혀 강물을 건널 때 입었던 진흙 묻은 분홍 스웨터를 함께 묻어 달라고 한다. '시네마 천국'이란 영화의 주인공 토토는 사춘기 때 첫눈에 반한 엘레나를 30년 동안 가슴속에 품고 산다. 이런 소설 같고 영화 같은 첫사랑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첫사랑은 그래서 아름답다.

당일치기 통영을 다녀오면서 청마문학관의 문화해설사로부터 "백석 시인이 예쁜 처녀를 찾아 통영에 왔다가 3편의 연애시를 쓴 게 있다"는 말을 들었다. 평북 정주 출신으로 줄곧 서울에서 생활해온 시인이 이곳 남도 쪽으로 발걸음을 했다는 게 신기하고 자못 흥미로웠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란 명시로 최고의 반열에 오른 시인이다. 또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 여사(기생명 진향, 백석이 지어준 이름 자야)의 연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 교사로 재직할 때 회식 자리에서 옆에 앉은 게 인연이 되어 "죽기 전에 우린 이별은 없어요"란 말 한마디에 콧대 센 진향이가 꼬여 들게 되었다.

백석은 키가 헌칠한 미남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멋쟁이였다. 짙은 감색 양복을 입고 올백 머리에 반짝거리는 광택구두를 신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학생들은 자지러졌다." 영생고보 부임 첫날 시인의 모습을 지켜본 후배 교사의 스케치다. 친구인 김기림은 "백석이 머리칼을 날리며 광화문에 나타나면 네거리가 온통 환해졌다"고 회상할 정도로 매력이 몸 전체를 감고 있었다.

백석은 겉모습만 치장하는 속빈 강정 같은 '모던 보이'는 아니었다.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시인이었고 러시아어와 일본어 그리고 영어까지 구사하는 지식인이었다. 그것보다는 바람 냄새가 나는 외모가 여성들을 꼬시는 주 무기였다. 시인은 26세, 28세 때 부모의 강권으로 두 번이나 결혼식을 올렸지만 초례를 치르고는 서울의 연인 자야네 집으로 뺑소니쳐버린 무책임한 사내다.

희대의 바람둥이지만 백석에게도 몽매에도 못 잊을 여인이 있었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인 24세 때 신문사 동료인 신중현과 함께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통영 출신 란(본명 박경련'당시 18세)이란 이화고녀 학생을 만나 그녀에게 마음을 뺏긴다. 백석이 쓴 산문에 '나는 항구의 처녀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는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라고 그녀의 모습을 그린 적도 있다.

시인은 란을 만나기 위해 세 차례나 통영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청혼 의사를 전한다. 그러나 친구인 신중현이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을 발설함으로써 혼사는 깨지고 만다. 대신에 자신이 란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밝혀 즉석에서 승낙을 얻는다. 친구의 절묘한 인터셉트로 그들은 37년 4월 7일 혼인하게 된다.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백석의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중에서)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시인이 정말로 사랑했던 여인은 누구였을까. 자야는 운명하기 몇 해 전 '내 사랑 백석'이란 책에서 "백석이 사귄 다섯 여자 가운데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자야였고 자신 또한 그와의 사랑을 올곧게 간직했다"고 말하고 있다. 일방적 진술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할까. 하늘나라에 드나드는 우편집배원이 있다면 백석의 근황을 물어보고 싶다. "어느 여자와 살고 있던가요." 입이 무거운 집배원은 대답이 없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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