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나라가 참으로 어수선하다. '문고리 권력'으로 불리는 청와대 비서관 및 행정관들과 '비선(秘線) 실세' 의혹을 받고 있는 정윤회 씨의 행적 논란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 비서실 공무원들이 국정에 개입할 아무런 권한이 없는 정 씨와 수시로 접촉하면서 중요 문서를 유출하고, 그의 지시로 고위직 인사를 주물러 왔다고 한다.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정치적 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비선 실세의 국정 개입 문제가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사가 되었다. 앞으로 사실 여부가 밝혀지겠지만, 이런 소동의 발생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상황에 대처하는 청와대와 검찰의 태도가 부자연스럽다.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일이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더욱이 출처가 청와대 보고서라면 사실 확인부터 철저히 해야 한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문건 유출을 국기문란이라고 질타했고, '찌라시'에 나오는 이야기로 나라가 흔들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했다. 우선적 조사 대상인 비서관들과 정 씨도 청와대 보고서를 '찌라시'로 격하하며, 문건 유출자와 기자를 처벌해 달라고 고소했다. 검찰의 초기 태도 또한 사실 확인보다는 유출자 색출과 명예훼손 처벌에 무게 중심이 놓인 모습이다.
이러한 발언과 관련자들의 행보는 국민의 일반적 정서와 어긋난다. 혼란과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국민은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이라는 초법적 행위가 정말 있었는지부터 명백하게 밝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문건의 내용이 사실로 확인되면, 관련자들을 엄중히 문책하고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리 떼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언론 보도 덕분에, 흔들리던 청와대 국정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있기도 하다.
이번 사태는 대통령의 권위를 크게 약화시키고 민주주의를 혼란에 빠트리는 심각한 문제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려면 대통령의 결단과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 대통령도 피해자일 수 있는 점에서 무엇보다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비선 실세의 국정 개입이 사실로 확인되면 문제 있는 측근을 배척하는 분명한 조치가 나와야 한다. 사인(私人) 또는 측근에 의존한 국정 수행의 유혹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의 확인 또한 필요하다.
대통령의 결단과 의지 못지않게 문제 해결에 사회 원로의 역할도 절실하다. 원로(元老)란 '어떤 분야에 오래 종사하여 나이와 공로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가리킨다. 1970년대 이후 학계, 종교계, 정치계의 많은 원로가 개인적 피해를 감수하며 올곧은 말과 강한 행동으로 군부 정권에 맞서 싸움으로써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요즘은 나라의 극한 혼돈 상황에서도 원로들의 비판적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고령화 속도가 세계 최고라는 한국에서 노인은 급증하지만, 원로 또는 사회의 어른이 갈수록 사라지는 역설적 상황이 아닌가?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지도자와 그 주변의 잘못, 그에 따른 정치적 대립은 어느 시기, 어느 조직에서나 나오는 일이다. 그럴 때 원로들이 한목소리로 잘못을 지적하고, 반성과 자기 개혁을 요구한다면 문제는 크게 확대되지 않고 쉽게 마무리될 수 있다. 그러나 원로들이 편을 따지고 개인적 이해관계를 계산하느라 침묵하면 권력자는 구성원들과 싸우고 버틸 뿐 사과하거나 잘못을 고치지 않는 법이다. 그 결과 조직은 더 심한 대립과 혼란, 퇴행과 파탄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
권력과 대척점에 선 야권 인사들은 청와대나 여당의 문제를 비판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지만, 의도와 무관하게 정치적 공격으로 오해받는다. 이런 점에서 여권의 원로 인사들이 이번 사태의 빠른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특히 청와대 비서들과 정 씨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김기춘 비서실장의 적극적 역할이 기대된다. 그동안 정권의 안정을 위해 조용히 문제를 덮어 왔다면 이제는 국가 원로로서, 또 조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자로서 사실 규명 작업에 앞장서 협조할 의무가 있다.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우리 편의 잘못부터 분명하게 꾸짖는 원로들의 진정한 용기가 그리운 시점이다.
이정복/ 대구대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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