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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목련을 기다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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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 뜨면 어디선가 꽃피는 소리 들린다. 내 머리맡 가장 가까운 곳에 황금빛 수선화가 피고 마당에는 민들레가 흰 방석을 깔기 시작했다. 산수유를 돌아 매화 향기 맑으니 아침이면 고무신 끌고 마당 한 바퀴 도는 사이 내 마음에도 엷은 꽃잎이 하늘거림을 느낀다. 이제부터 꽃 몸살이 시작되겠구나 싶어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신비스러움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어젯밤은 유독 환해서 창을 열어보니 훈훈한 봄밤에 목련나무가 수백 개의 촛불을 들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봉오리마다 곧 벌어질 듯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었는데,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유럽의 대성당 천장에나 달려 있을 듯한 샹들리에 같아 보였다. 목련은 이 밤을 위해 시린 발목을 딛고 오로지 온몸으로 기도하는 여인처럼 마음을 모았을 것이다. 그 시린 시간들이 하나둘 촛불이 되어, 그 일렁임을 감싸 안고 내 창가로 걸어오는 옷자락 끌리는 소리에 나는 또 밤잠을 설칠 것이다.

한때 목련이 피면 내 안에 뭉글거림도 같이 피어올라 흰 그늘 아래서 얼마나 서성거렸던지, 그때 뭉글거린 밤들은 지금쯤 무엇이 되었을까. 어쩌면 껍질 속에서 희디흰 꽃잎을 말아 올리느라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꽃피는 밤은 유난히 고요해서 꽃잎 열리는 소리 들리고, 목련의 흰 살결 속으로 검은빛이 다 빨려들기라도 하는지, 밤은 흰 꽃잎에 갇혀 어딘가로 한없이 침잠해 들어간다. 그런 밤이면 누군가 흰 그늘을 밟고 밤의 골목으로 들어설 것 같아 대문 밖을 서성거리며, 오래전 목련꽃 그늘 아래서 '젊은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고 나의 베르테르를 향해 편지를 쓰기도 했던 그때를 떠올려보지만, 목련에 대해 그리고 당신에 대해 제대로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러기에 꽃이 오는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것일까. 목련이 환하게 촛불 켜는 밤 홀로 어둠 속에 앉아 그늘에 비친 허허로움을 더듬으며 더 높고 더 깊은 말을 찾아 어둠 속으로 꽃잎을 밀어 넣다가 문득 꼬깃꼬깃 접힌 편지 같은 말을 펴본다. '가장 값진 것을 보기 위해 잠깐 눈을 감는다. 가장 참된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는다. 가장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 말은 눈이 안 보이는 남자와 척추장애를 가진 여자의 사랑 얘기라고 전해 들은 적 있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도 목련꽃 그늘을 향해, 그리고 서로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다시 또 아침이 오면 깃털이 뽀얀 새가 되어 홀연히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목련을 가장 진실한 말로 옮겨보려고 이슥도록 침묵 속에 기다리는 봄밤이다.

이 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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