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도심 속 한옥] (1)잊힌 한옥

대구 한옥 數 전주의 4배, 보물 갖고도 먼지만 쌓다

29일 대구 중구 동산동의 한 한옥. 주인의 손길이 오래동안 닿지 않아 흉물로 방치돼 있다.우태욱 기자 woo@msnet.co.kr
29일 대구 중구 동산동의 한 한옥. 주인의 손길이 오래동안 닿지 않아 흉물로 방치돼 있다.우태욱 기자 woo@msnet.co.kr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를 따라 도심을 지키던 읍성이 허물어진 지 100여 년이 지났지만 근대 문화가 잘 보존된 대구 읍성 안엔 옛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한약방이 줄지어 있는 약전골목을 비롯해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 계산성당 등 근대 건축물은 도심 속에서 100년 전 대구의 숨결을 느끼게 해준다.

진골목, 북성로 등 읍성 곳곳에 자리한 한옥도 눈길을 끈다. 이들 한옥은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대구의 귀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도심 곳곳에 자리 잡아 고풍스러운 멋을 자랑하던 한옥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어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한옥에 살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양옥 주택, 아파트 등 편한 주거 공간으로 이사하면서 폐가나 우범지대로 전락하는 한옥이 늘어나고 있다. 또 아파트나 다가구주택 등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철거 위기에 놓인 한옥들도 적잖다. 사라질 위기에 놓인 한옥의 현실과 보존 대책 등을 짚어본다.

◆보존가치 높은집, 주인이 술집 열어

2011년 가을, 영국에서 온 백발의 노교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1년 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아름다움을 뽐내던 대구 중구 수동의 한 한옥이 펜스에 둘러싸여 철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셰필드대학 명예교수인 제임스 그레이슨 교수는 다가구주택을 짓기 위해 허물어지고 있는 한옥을 보면서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10개가 넘는 안채와 사랑채, 넓은 마당까지 있었던 그 한옥은 과거 한양 상류층들의 가옥과 유사한 형태로 대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한옥이었다.

그는 1973년 선교사로 대구에 와 대학에서 신학, 한국학 등을 강의하며 20년 넘게 한국 문화를 연구했다. 2010년 계명대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대구에 몇 달 머물 때도 커다란 종이에 보존 가치가 있는 근대 건축물과 한옥들을 표시한 '대구읍성 내부조사 보고서'를 직접 만들 정도로 읍성 문화에 애정이 깊었다.

그레이슨 교수는 "끝까지 잘 보존되지 못해 대구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문화적 손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중구청도 애가 타긴 마찬가지였다. 한옥이 헐린 자리에 원룸이 들어선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중구청은 이미 멸실'건축허가를 내준 상황이라 불난 집에 불구경하듯 철거를 지켜봐야 했다.

한옥 수난사는 이뿐만이 아니다. 2009년 중구청은 근대문화체험관 장소를 물색하던 중 중구 계산동에서 오래됐지만 잘 보존된 한옥을 찾아내고 이를 사들이려고 했다. 지어진 지 80년이 넘었지만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민속문화체험장, 역사전시관 등으로 쓰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구청은 한옥 소유자와 6개월 동안 매매가 협상을 했지만 결국 사들이지 못했다. 한옥 소유자가 구청이 제안한 가격의 배 이상을 원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한옥은 한옥 본연의 멋스러움을 살리지 못한 채 술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구청 관계자는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 아닌 이상 문화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어도 개인이 어떻게 사용하든, 허물든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다"며 "한옥 등 행정기관이 개인 재산을 사들이려고 할 때 소유자가 구청이 의뢰한 감정가보다 두 배, 세 배 이상 높은 가격을 부르는 경우가 많아 사업 진행이 순탄치 않다"고 했다.

◆"관리 힘들어" 방치되다 흉물 신세

한옥이 헐리지 않은 채 남아있다고 해서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발길이 오래 닿지 않은 한옥은 이웃 주민들에게 그저 애물단지일 뿐이다.

건축도시공간연구소의 '2013 전국 한옥 분포 현황 조사'에 따르면 대구에 있는 한옥 총 1만753채 가운데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가는 568채(5.3%)를 차지했다.

한옥의 상'하부 구조 모두 유지관리 상태가 좋지 않아 외관상 겨우 한옥임을 알아볼 수 있는 C등급의 한옥은 대구에 총 4천895채로 전체 한옥의 45.5% 수준이었다.

대구의 대표적 한옥 밀집지역 중 하나인 중구 동산동 옛 구암서원 인근에는 1930, 40년대에 지어진 한옥 수십 채가 줄지어 있다. 사단법인 대구문화유산이 2013년 이 일대 한옥 72채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이 가운데 12곳이 사람이 살지 않고 방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옛 구암서원과 약 50m 거리에 있는 한 한옥은 한눈에 봐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다. 대문이 무너진 자리에 철판을 덧대 집 내부를 가렸고, 지붕에서 자란 담쟁이넝쿨이 무성해져 담장 바깥 절반 이상을 덮고 있었다. 기와 밑을 채운 흙이 아래로 흘러내려 기와 수십 개는 무너져 내리기까지 했다.

주민 이모(64) 씨는 "80세가 넘은 집주인이 20년 전 아파트로 이사를 간 뒤 집을 돌보지 않아 폐허가 됐다. 집이 낡아 여름에는 바퀴벌레가 들끓고 밤이 되면 안에 새끼를 친 고양이 울음소리로 음산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대구의 한 구청 관계자는 "노부모가 돌아가신 뒤 한옥을 물려받은 자식들이 관리를 하지 않아 사실상 방치된 곳이 많다. 오래돼 낡은 데다 누수, 웃풍 등의 수리비가 감당이 안 돼 폐허로 변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갖고만 있는 것이다. 한옥이 흉물로 변해도 개인 사유 재산인 만큼 관에서는 관리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노릇이다"고 했다.

◆신축 5천·수선 4천만원까지 지원

도심에 근대 건축물과 근대골목 등 읍성 문화가 그대로 녹아 있는 대구는 한옥 자원도 풍부하다.

타시도와 비교했을 때 보유하고 있는 한옥 수도 압도적이다.

국가한옥센터에 따르면 대구에 있는 한옥 수는 1만753채(2013년 기준)로 현재까지 전수조사가 완료된 전주(2천512채)와 나주(238채)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

대도시인데도 불구하고 지방 도시보다 한옥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A등급 한옥 비중도 높은 편이다.

특히 대구 읍성 내 한옥 중 A등급이 358채(20.4%), B등급이 849채(48.5%), C등급이 545채(31.1%)인 반면, 전주 읍성의 경우 A등급이 30채(12.6%), B등급 137채(57.6%), C등급이 71채(29.8%)로 조사됐다.

한옥에 대한 대구시의 관심도 타지자체보다 높다.

전국에서 한옥을 전수 조사해 구군별로 한옥 등급을 매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것도 대구시가 최초다.

대구시는 2013년 11월 대구시한옥진흥조례를 제정했고 지난달부터는 한옥지원사업도 시작했다.

한옥 신축의 경우 공사비 3분의 2범위 안에서 3천만~5천만원, 전면 수선은 공사비 3분의 2범위 안에서 2천만~4천만원까지 지원하고 있다.

특히 한옥보호구역 내 한옥에 대해서는 지원금이 두 배인데, 현재 달성토성 인근 약 6만7천㎡와 약령시 일대 44만㎡가 지정된 상태다.

하지만 한옥의 철거를 막거나 폐허가 된 한옥을 관에서 주도적으로 보수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은 없어 제2, 3의 한옥 수난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건축도시공간연구소 진태승 연구원은 "현재 한옥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는 이상 보존 가치가 있더라도 개인이 사고팔거나 허무는데 아무런 법적 장치가 없는 것이 문제다"며 "건축물관리대장, 용도지역지구 등의 도시관리 데이터베이스와 한옥 자료와의 연계를 통해 한옥 멸실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허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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