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와 김고은의 만남, 카리스마 여제와 충무로 신성의 앙상블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끈다. 게다가 여성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액션 누아르이다. 여성 투톱 누아르는 류승완 연출, 전도연, 이혜영 주연의 '피도 눈물도 없이'(2002)가 거의 유일했는데, 이후 명맥이 끊겼다가 매우 오랜만에 만들어졌다. 이번 영화로 장편 데뷔하는 한준희 감독은 30대 초반의 젊은 영화인으로 단편 '시나리오 가이드'를 연출했고, '사이코메트리'(2013)의 각본가로 알려져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이 배경이다. 배두나 주연의 '고양이를 부탁해'(2001) 이후 차이나타운을 주요 배경으로 설정한 영화도 오랜만이다.
액션 누아르, 여배우들의 대결, 이국적인 다문화공간, 전이된 성 역할, 유기된 아이들…. 영화를 구성하는 아이디어는 매력이 넘친다. 무엇보다도 한국영화를 남자들이 완전히 장악한 2000년대 이후, 여배우들은 멜로드라마의 비련의 주인공이나, 남성적 장르 영화에서 주인공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이에 여자들이 거칠고 무게 있는 역할로 극을 끌어가는 짙은 감성의 장르 영화가 꼭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야 한국영화가 장르적으로 더 풍부해지고, 여성들이 스크린에서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낼 것이며, 새로운 영역을 향해 나아가는 여배우의 진화 모델을 만들어낼 것이다. 하이틴스타에서 연기파로 거듭난 여배우의 롤모델 김혜수와, '은교'(2012)에서의 파격적인 데뷔 이후 끊임없는 연기변신으로 동급 최강의 잠재력을 보이고 있는 김고은의 결합은 최선의 카드다.
지하철 보관함 10번에 버려져 이름이 '일영'(김고은)인 아이. 아이는 오직 쓸모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차이나타운에서 '엄마'(김혜수)라 불리는 여자를 만난다. 엄마는 일영을 비롯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아이들을 거둬들이고 식구를 만들어 차이나타운을 지배한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가 일영에게는 유일하게 돌아갈 집이다. 그리고 일영은 엄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아이로 자란다. 그러던 어느 날 일영은 엄마의 돈을 빌려간 악성채무자의 아들 석현(박보검)을 만난다. 그는 일영에게 엄마와는 전혀 다른 따뜻하고 친절한 세상을 보여준다. 일영은 처음으로 차이나타운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이 궁금해진다. 그런 일영의 변화를 감지한 엄마는 그녀에게 위험천만한 마지막 일을 준다.
영화는 누아르 장르에서 고정된 것으로 여겨지는 성 역할 전이를 통해 전복적 즐거움을 준다. 대도시가 아닌 도시 주변공간인 차이나타운이라는 설정, 여자 보스와 그의 여자 부하, 부하인 여자가 자신의 역할을 망각하고 일을 그르치게 되는 이유는 마음을 앗아간 채무자 남자 때문이다. '달콤한 인생'(2005)에서 김영철, 이병헌, 신민아의 관계가 '차이나타운'에서는 성을 바꾸어 진행된다. 늘 먹던 짜장면이 아닌 파스타의 맛을 본 후, 일영은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죽 재킷을 벗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서 다른 공간을 꿈꿔보지만, 차이나타운에서 살아가도록 설계된 그녀의 운명을 개인의 의지로 돌파해낼 수 있을지가 서사를 끌어가는 추동력이 된다.
누아르 장르를 비트는 설정과 아이디어, 보라색과 초록색이 주는 시각적 웅장함, 가까운 곳임에도 이국적인 풍경이 주는 감흥, 거친 액션을 구사하는 독한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장점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기대감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인물과 설정이 버겁게 느껴진다. 논리성과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서사는 흡인력 있게 관객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캐릭터의 진전과 변신을 설명하기에는 표현이 허술하다. 외로워도 슬퍼도 웃는 캔디형 남자에게 독하고 거친 젊은 여자가 매료되며 변하는 설정은 설득력이 약하다. 마지막 절정을 향해 영화는 거침없이 나아가고, 장르 규칙대로 반전을 끼워 넣는데, 이마저도 예상이 된다. 엄마 캐릭터보다는 배우 김혜수가 도드라지는 매너리즘 연기, 캐릭터 변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만 김고은의 연기 해석은 거대한 연기 앙상블에 대한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가 극을 끌어가는 장르 영화에 대한 실험은 멈춰서는 안 된다. 풍부하고 에너지 넘치는 한국 장르 영화를 위해서 더욱 다양한 시도가 앞으로도 있길 응원한다. 이 영화의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는 한국형 액션 누아르의 진화를 위한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다. 두 여배우의 짙은 감수성이 묻어나는 고혹적인 눈동자에 건배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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