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는 골목길 도시다] <7>소박한 삶의 공간, 미로골목 (중)

화초 키우고 텃밭 가꾸고…담벼락 따라 '미니 정원'

골목길에서 대화를 나누는 주민들. 대구 동구.
골목길에서 대화를 나누는 주민들. 대구 동구.
막다른 골목은 도심 속 정원으로도 활용된다. 대구 수성구.
막다른 골목은 도심 속 정원으로도 활용된다. 대구 수성구.
도심 속 미로골목. 대구 중구
도심 속 미로골목. 대구 중구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구시가지. 출처=스플리트시(市) 홈페이지(visitsplit.com)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구시가지. 출처=스플리트시(市) 홈페이지(visitsplit.com)

'마을'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 뜻이 나온다. 하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런데 또 하나는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라면 더더욱 낯설다. 바로 '이웃에 놀러 다니는 일'이다. 아마도 '마실(마을의 사투리) 간다'는 경상도 사투리 표현이 두 의미를 모두 포괄할 것이다. 예컨대 할머니가 "마실 간다"고 하시면, 어떤 때에는 개천이나 고개 넘어 다른 마을을 방문하시는 것이지만, 대부분은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을 만나러 가시는 것일 테니까.

◆사라지는 골목길, 사라지는 공동체

하나의 단어가 두 가지 이상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경우 각각의 뜻들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또 각각의 의미들은 인간이 오랜 시간 관찰하고 체험해 단어에 주입한 것이므로 꽤 자명하다. 두 명제를 종합해 풀어 본 '마을'의 참뜻은 이렇다. '여러 집이 모여 친하게 지내며 사는 공동체'. 인간이 오랜 시간 관찰하고 체험해 온 마을의 원형이 아닐까.

이런 마을의 모습을 현대 도시에서는 찾기 힘들다. 여러 집이 모여 살기는 하는데, 이웃에 놀러 다니는 일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그렇다. 물론 몇 집끼리 소규모로 교류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 가구가 한데 어우러지는 마을 공동체의 모습은 찾기 어렵다. 왜일까. 마실 가는 길, 즉 골목길이 없어서다. 대신 아파트에는 복도와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아파트에서는 좀체 찾기 힘든 분위기와 기능이 골목길, 특히 미로골목 속에는 있다.

◆미로골목의 매력, 막다른 골목

'골목'이라는 단어 앞에 '미로'라는 수식이 붙는 이유는 단지 복잡한 길을 헤매야해서만은 아니다. 미로 찾기 게임에서 겪을 수 있듯이 길이 막히면 되돌아가야 하는 '막다른 골목'도 있어서다. 막다른 골목은 외국에도 있는 개념이다. 영어로 '컬드삭'(cul de sac)이라고 한다. 프랑스어 '꿔드삭'이 원조다.

우리나라에서 막다른 골목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미로골목처럼 막다른 골목도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서양의 경우 도시계획을 수립해 온 역사가 길다. 그래서 주택가를 지나는 교통을 제한하기 위해 일부러 막다른 골목을 설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도시의 밀도가 높아지는 과정에서 집과 집이 큰 통제 없이 모여들며 막다른 골목도 자연스럽게 형성됐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일제강점기의 대대적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낳은 의도치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폭이 좁고 기다란 일본식 마치야 주택이 나란히 들어설 것을 염두에 두고 마련된 부지에 정방형의 한옥들이 지어지다 보니, 규격이 맞지 않아 자투리 부지가 생겨났고 한옥 3채가 이 자투리 부지를 둘러싸고 공유하는 식의 막다른 골목이 생성됐다는 분석이다.

컬드삭은 서양에서 '궁지에 처한 사정'이나 '장래성 없는 직업'도 나타내는 등 대체로 부정적인 단어다. 하지만 우리 미로골목에서는 꽤 긍정적으로 또 실용적으로 해석된다. 우선 이웃과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는, 즉 서로 '마실 갈 수 있는' 통로다. 그러면서 개인의 정원이나 작업장 등으로도 쓸 수 있는 공간이다. CC(폐쇄회로)TV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웃 어른들끼리 상호 방범을 해 줄 수 있어 동네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도 된다.

모두 요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누리기 힘들어 아쉬워하는 요소들이고, 지난 20세기에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자신의 저서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옛적에 우리는 골목길 대문 앞에서 축구를 하고 야구를 했다. 굳이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같은 것이 따로 필요 없었다.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놀 때,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어머니들은 자연스레 골목길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은 자기 집 앞 골목길을 내부 공간처럼 사용했다. 거리를 거실처럼 느꼈고, 이건 곧 공동체 의식이 높다는 증거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사람 사는 가치 품는 미로골목

대구 북구 복현동 경북대학교와 경진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한 주택가에도 거미줄 같은 미로골목이 펼쳐져 있다. 둥근 고리 형으로 골목이 형성돼 있어 출입구가 여러 개이며 그래서 비교적 빠져나오기 쉬운 미로골목이다. 이곳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골목에 비해 주택과 담의 높이가 낮고 주변에 높은 건물도 없어 골목 구석구석으로 햇빛이 잘 든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집집이 대문 양옆으로 꽃을 심은 화분을 여러 개 두고, 작은 화단을 만들어 나무도 키우며, 이런저런 채소도 가꾸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 건축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화초와 꽃이 골목길에서 잘 자라고 있다면, 사람들은 건물 내부에서 느끼는 편안한 인간관계를 거리에서도 느낄 수 있게 되며, 심지어 집에 있는 것과 같은 편안함마저 느끼게 된다. 이것은 주민들이 골목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선물과도 같다"고 했다. 또 이곳에서 골목길이 모이는 삼거리나 사거리는 빠짐없이 여러 이웃이 함께 쓰는 마당이 된다. 주민들은 대문 앞에 각종 생활도구를 꺼내어 놓고 채소를 다듬는 등 서슴지 않고 편안하게 집안일을 한다. 불과 수십m만 걸어나가도 차가 쌩쌩 달리는 차도가 나온다.

이 같은 도심 속 미로골목 공동체는 대구 중구 남산동 반월당SK허브스카이 뒤편, 대구시민회관 건너 쪽방촌, 달성공원에 인접한 중구 달성동 및 서구 비산동 일대, 동구 대구공군기지(K2) 주변과 입석동 행복마을, 북구 고성아파트 건너편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밖에도 시간이 없어 취재하지 못한 곳이 적지 않다.

◆미로골목은 세계 공통 히트 관광 아이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역사지구와 디오클레티아누스 왕궁. 이곳은 1천700년 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여생을 평온하게 보내기 위해 지은 성곽도시다. 이후 로마 황제들이 휴양을 위해 찾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로마의 익히 알려진 유적지들과 또 다른 매력의 로마 문명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왕궁만큼이나 주변 구시가지가 유명하다. 시가지의 뼈대를 형성하고 있는 미로골목 덕분이다.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떠오른 까닭에 카페와 레스토랑 등 상점이 곳곳에 들어서 있지만, 창가의 화분과 아무렇게나 널어놓은 빨래 등 주민들의 소박한 삶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어서다.

오래된 미로골목의 매력을 살려 세계적인 관광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구시가지가 많다. 미로골목의 생성 시기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다양하다.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돼 있으며, 거대한 성 안 9천여 개의 미로골목을 자랑하는 모로코 페스의 메디나와 시가지 전체가 미로 구조인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비롯, 체코 프라하의 올드타운, 중국 상하이의 타이캉루와 베이징의 후퉁, 일본 도쿄의 가구라자카 등이 유명하다. 이들 구시가지에는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대단한 유적이나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같은 특급 명소는 없다. 대신 잘 보존된, 그러니까 골목길 특유의 정취는 살리고 편의성을 보완한 미로골목 자체가 관광객을 그러모으고 있다.

글 사진 황희진 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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