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2천 년 자비 불교

'정의를 위해 몸 버린 것만도 놀라운데/천화(天花'천상계에 피는 영묘한 꽃)와 젖빛 흰 피가 더욱 깊이 느껴지네/문득 한칼에 목숨이 없어진 뒤/절마다 쇠북소리가 서울을 흔드네.'(삼국유사 제3 흥법, 일연 스님)

신라는 3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다. 그것도 26세의 꽃다운 젊은 신하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공인이 이뤄졌다. 527년, 순교 전 그는 왕에게 한마디 남겼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목숨입니다. 이 몸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불교가 행해지면 부처가 하늘에 오르고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실 것입니다."

그 소원처럼 마침내 불교가 공인돼 아침저녁으로 행해졌다. 또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 그의 순교를 기리며 '절마다 쇠북소리가 서울(경주)을 흔드네'(院院鐘聲動帝京)라고 노래한 것처럼 과연 절의 종소리가 경주를 진동했다. 그가 순교한 뒤 경주에는 일연 스님의 표현처럼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었고(寺寺星張),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을 지어(塔塔雁行)' 세워졌기 때문이다.

불교는 고려에서도 번성했다. 태조 왕건은 후손이 지킬 10가지 '훈요'(訓要)의 제1조에 "우리나라 대업은 여러 부처님의 호위를 힘입었다"며 불교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태조는 사찰도 많이 지었다. 후손에게는 사찰을 잘 다스리고 함부로 짓지 말 것을 2조목에 걸쳐 당부했다. 그러나 지침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사찰은 계속 늘었다. 학계는 고려 말 사찰은 5천100개, 승려는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했다. 이와 달리 조선에서는 숭유억불(崇儒抑佛)로 많은 사찰이 사라졌다. 사찰 자리에 유학을 가르치는 서원(書院)이 서는 등 불교는 심하게 핍박받았다.

굴곡진 2천 년의 우리 불교역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慈悲)의 전파였다. 자비는 서양 종교가 강조하는 '사랑'일 것이다. 자비가 바탕인 부처의 가르침은 신라에서는 고승 원효를 통해 '화쟁'(和諍)과 '원융'(圓融)의 모습이었다. 고려에서는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선종과 교종의 선교통합(禪敎統合)으로 나타났다. 조선에서는 서산 대사의 선교일치(禪敎一致)와 유불도통합(儒佛道統合)이었다. 시대는 달라도 가르침은 '배타'가 아닌 '포용'을 밑바탕으로 했다. 이는 바로 단군의 '홍익'(弘益) 이념과도 통한다면 무리일까. 어제 불기 2천559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2천 년 우리 불교 가르침에 흐르는 공통점이 뭔지 한번 생각해봤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