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일본 언론의 침묵

나치 독일과 소련은 엄청난 수의 비밀경찰이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경찰국가가 아니었다. 이들 두 독재국가의 보안기관 규모는 일반의 상식과 달리 매우 왜소했다. 나치 독일의 경우 정치경찰인 게슈타포는 1930년대 정점에 이르렀을 때도 그 수는 2만 명 정도였다.(7천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독일 전체 인구가 6천800만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매우 적은 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 중 상당수는 행정사무직과 타자수였다.

도시별 정치경찰의 수를 봐도 그 왜소함은 잘 드러난다. 독일 주요 도시의 하나인 프랑크푸르트의 경우 1934년 당시 비밀경찰의 수는 41명이었다. 또 루르 계곡 서쪽 주민의 '관리'를 맡고 있던 게슈타포 뒤셀도르프 사무소 역시 주민 400만 명을 281명의 정치경찰이 담당하고 있었다.

소련의 사정도 비슷했다. KGB(국가보안위원회)의 전신으로, 스탈린의 '대숙청'을 집행했던 NKVD(엔카베데, 내무인민위원부) 직원은 1939년에 총 36만6천 명이었다. 나치보다 훨씬 많지만 NKVD 직원 대다수가 국경 수비대와 정규 경찰, 국내 보안군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NKVD는 교통체계 안전 유지와 국가 소방서 운영도 맡고 있었다. 이들을 제외한 정치경찰은 나치와 같은 2만 명이었다. 당시 러시아 전체 인구가 1억7천 만 명이었으니 정치경찰 1인당 인구 수는 나치보다 훨씬 더 많다.

이처럼 '수적 열세'에도 나치와 소련의 감시기구는 잘 기능했다. 그 비밀은 국민의 협조와 공모였다. 나치의 경우 게슈타포의 작전 활동은 전체의 절반에서 3분의 2가 대중의 고발에 의지했다. 정치경찰의 '인지 수사'는 남아있는 수사기록의 10%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이러한 적극적인 방식과 달리 소극적인 협조와 공모도 있었다. 바로 침묵이다. 이것이 어쩌면 나치와 소련의 폭정이 유지되는데 적극적인 고발 이상의 도움을 줬는지 모른다.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부 역사왜곡'을 그만두라고 한 일본 16개 역사학단체 회원의 성명을 일본 언론이 보도를 외면했다. 지난 25일 발표된 이 성명을 보도한 신문은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 2곳뿐이라고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러한 일본 언론의 침묵은 아베 총리로 하여금 잘못된 길을 계속 가도록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 언론의 침묵은 소극적인 협조를 넘어서는 적극적인 방조다. '감시견'이 짖지 않는 일본의 앞날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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