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봉 주교는 프랑스 오를레앙 출신으로 본명은 르네 뒤퐁(René Dupont)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오로지 예수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제가 되었다. 1953년, 그의 나이 24살 때였다.
사제가 된 다음해 파리외방전교회의 전도사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첫 임지는 대전 대흥동성당, 그곳에서 보좌신부로 일하면서 프랑스 성(姓) 뒤퐁의 음을 딴 '두봉'이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안동교구의 주교 등을 거치면서 농민 사목과 지역사회 발전에 힘써 왔다.
그러기를 60년, 그는 한국 가톨릭의 큰 기둥이자 정신이 되어 있다. 지위가 높아서만도 아니고 힘이 있어서도 아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향한 끝없는 사랑과 헌신, 사회문제에 대해 겸손하고도 실천적인 관심, 그리고 무엇보다 늘 행복한 모습에 천사 같은 웃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다.
대립과 갈등이 날로 험해지는 세상,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경북 의성군 봉양면 문화마을에 있는 그의 집에서 한 잔의 차를 앞에 두고 물었다. 서로를 아끼며 더불어 잘 살아갈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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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절제하는 삶
김병준: 어떻게 한국에 오시게 되었나?
두봉: 나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발령이 그렇게 났다. 그러나 정말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왜냐? 당시 한국은 전쟁 직후라 매우 어려웠다. 신부로서 그런 어려운 나라에 올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또 있다. 한국전쟁 당시 군대생활을 했는데, 같이 근무하다 이 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잃은 친구가 있었다. 친구가 목숨을 바친 나라, 그래서 더 뜻 깊었다.
김병준: 처음부터 이쪽, 즉 경북 북부에 계셨던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두봉: 대전교구 대흥동본당의 보좌신부로 첫 발령을 받았고, 이후 한동안 대전과 충남 일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1969년 안동교구가 생기면서 주교가 되어 이쪽으로 와서 22년을 살았다. 안동교구장을 그만둔 후에는 경기도 행주로 가서 15년을 살았다. 그러다 다시 '고향'으로 와 달라는 안동교구의 요청으로 이렇게 와서 살고 있다. 다 합치면 약 30년 산 셈이 된다.
김병준: 그런데 여기는 안동이 아니라 의성이다. 어떻게 여기에 자리 잡으셨나?
두봉: 다른 이유 없다. 선교사니까 될 수 있으면 신자가 없는 데서 살고 싶었다. 그곳이 의성 봉양이었다. 물론 나이도 있고 해서 선교를 적극적으로 할 입장은 못 된다.
김병준: 한국에 오신지 60년이다. 그동안 나라가 많이 변했으리라 생각한다.
두봉: 말도 못하게 변했다. 전쟁 직후에는 성당에서 밀가루, 강냉이, 옷 등 미국 구호물자를 나누어줄 정도였다. 정부는 이를 나누어 줄 조직기반조차 없었다. 이제는 선진국이다. 밤이 낮이 된 것처럼 바뀌었다.
김병준: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두봉: 물질적으로는 많이 발전했다. 먹을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병원도 쉽게 갈 수 있다. 그런데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한다. 또 그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잘 나누어 쓰지 않는다. 그래서 그렇다.
김병준: 외람된 질문 하나를 드리자.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 때 좀 더 잘 만들 수 없었나?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알고, 나누어 쓸 줄도 아는 존재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불완전하게 만들어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나?
두봉: 아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잘 만들었다. 배우고 노력하면서 완전해지도록 만들었다. 행복하게 살려면 남에게 행복을 주어야 한다. 기쁘게 살려면 남에게 기쁨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성장해 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김병준: 딱한 사람 너무 많아 드리는 말씀이다.
두봉: 세상의 부가 일부의 손에 들어가 있다. 이 사람들이 제대로 나누면 너나없이 사람다운 삶은 살 수 있을 텐데 그렇지가 못하다. 나누면서 더불어 사는 공동체 정신이 아쉽다.
김병준: 그런 점에서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었다. 나눔의 철학을 강조하신 게 마음에 남는다. 같은 맥락에서 19세기 말, 레오 13세 교황의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 즉 '새로운 것들에 대하여'도 감동적이다. 노동자들의 궁핍한 삶에 가슴 아파하며 가진 사람들의 나눔을 강조하는 부분이 그렇다.
두봉: 어렵고 긴 글인데 그걸 읽었나? 가톨릭에서는 사회문제에 대한 교재로 쓰고 있다. 절제하며 나누어 쓰는 것은 가톨릭의 기본 정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며칠 내에 공공선으로서의 환경 문제에 대해 말씀을 하신다고 한다. 이 또한 궁극적으로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일이다. 지구의 기후변화가 결국은 없는 지역과 없는 사람들을 먼저 힘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병준: 어떤 말씀이 되실 것 같나?
두봉: 아직 발표 전이라 짐작만 하고 있다. 안 써도 되는 전기를 쓰고, 타지 않아도 되는 차를 타고 하는 것 등에 대한 걱정 아니겠나. 소비가 미덕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말씀일 게다.
* 편집자 주: 대담 며칠 후인 6월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기후변화 문제와 이에 대한 전 지구적 대응을 촉구하는 회칙을 발표했다. 이 회칙에서 교황은 '생태적 회개'를 통해 에너지 소비양식과 생활양식을 바꾸어 갈 것을 요청했다.
◆현실적 문제에 대한 관심
김병준: 가톨릭은 현실문제에 대해 관심이 크다. 레오 13세 교황이나 프란치스코 교황만 봐도 그렇다.
두봉: 호소하는 거다. 레오 13세는 노동자들이 조직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 이들을 위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호소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또한 절제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고 있다.
김병준: 중요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고, 또 용기를 준다. 한국의 민주화만 해도 그렇다. 가톨릭 사제들의 관심과 참여는 대단히 큰 의미를 지녔다. 주교께서도 이 과정에서 고초를 겪으신 것으로 알고 있다.
두봉: 그런 일이 있었다. 1979년이었다. 정부와 일부러 맞서려 한 것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추방명령까지 받게 되었다. 외국인 선교사가 국내 정치문제에 개입했다는 이유에서였다.
* 편집자 주: 소위 '오원춘 사건'이다. 경북 영양군 농민들이 농협에서 알선한 씨감자를 심었으나 싹이 나지 않아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 이에 오원춘을 비롯한 농민들은 항의를 했고 그 결과 보상을 받았다. 이후 오원춘은 농민들을 상대로 이 과정을 강의하러 다녔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중앙정보부가 그를 강제 연행했다. 20일 뒤 풀려난 오원춘은 이 사실을 가톨릭에 알렸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각종의 기도회 등 다양한 형태의 항의성 집회가 일어나게 되었다. 정부는 이에 강력히 대응하기로 했고, 이 과정에서 안동교구장인 두봉 주교를 추방하기로 결정한다.
김병준: 가톨릭 단체들이 늘 정부를 반대했나?
두봉: 그렇지 않다. 새마을 운동도 열심히 하곤 했다. 그러나 정부 입장이 옳지 않은 경우 이에 문제를 제기하곤 했다. 예컨대 농협조합장을 선거로 뽑게 되어 있는데, 사실상 모두 임명하다시피 하니 그게 옳지 않다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게 다 문제가 되었다.
김병준: 추방 결정에는 어떻게 대응했나?
두봉: 교황이 임명한 주교를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방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우리도 교황청에 보고를 했고 정부도 일방적으로 집행할 수 없는 일이라 교황청과 협의를 했다. 그러던 중 로마 교황청에서 불렀고,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과 주교회의 의장과 함께 로마로 갔다.
김병준: 당시, 누가 교황이었나?
두봉: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었다. 한국 내부 사정을 잘 아실 리가 없지 않나. 그래서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을 드렸다. 인권보호 등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기도 했다. 그랬더니 교황께서 "두봉 주교의 추방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김병준: 그래서 어떻게 되셨나?
두봉: 귀국을 했다. 그런데 한 달 뒤에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서거했다. 그걸로 그 일은 끝이 났다.
김병준: 종교가 이렇게 현실문제에 뛰어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다. 일부 인사는 죽고 난 뒤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의문이 든다. 죽고 나서 구원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세계를 보다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도 종교의 중요한 사명 아닌가?
두봉: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레오 13세 교황께서도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늘나라로 걸어가는 나그네다. 나그네가 길을 가는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모른 채 지나가면 어떻게 되겠나?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느님 나라로 가겠나?
김병준: 귀한 말씀이다. 나누어 써야 할 사람들이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공동체의 의미
김병준: 레오 13세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교황도 그렇다. 공동체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국가권력을 통해서 풀기보다는 공동체 정신으로 '우리가'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두봉: 교황께서는 '우리 가톨릭'이라 하지 않는다. '우리 공동체'라 한다. 너나 구별 없이 서로가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고, 이러한 공동체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김병준: 그런 정신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지난번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다. 교황께서 유족을 방문한 것을 두고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셨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딱하다. 교황의 말씀과 행동까지도 편 가르기에 집어넣으려 한다.
두봉: 그래서는 안 된다. 구별하여 싸우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심지어 종교조차도 네 종교 내 종교를 따져가며 싸울 이유가 없다. 나도 2년 전에 만해대상을 받았다. 종교를 초월해서 주고받은 것이다.
김병준: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싸움도 많고 이해관계 대립도 많다.
두봉: 그동안 인권이 약하다 보니 인권을 강조해 왔다. 잘한 일이다. 그런데 일부분 이것이 개인의 권리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잘못 흘러가고 있다. 그 결과 강해진 권리와 권리가 부딪친다. 공동체 의식과 공공선이 같이 커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했다는 말이다. 심지어 성당 안에서도 자신도 모르게 자기 이익만 챙기는 일이 있다.
김병준: 공동체도 여러 형태의 공동체가 있겠는데, 가장 중요한 공동체가 무엇이라고 보나?
두봉: 가정이다. 가정이 선하면 다른 공동체도 저절로 잘 이루어진다. 옛말에도 가화만사성이라 하지 않았나.
김병준: 요즈음 가족이나 가정을 너무 중시하면 보수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유럽의 경우 혼외 출산이 50%를 넘는다. 결혼제도 그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나라까지 나오고 있다.
두봉: 그래서는 안 된다. 가족과 가정은 모든 공동체와 공동체적 가치의 기본이자 출발점이다. 보수적이라 해도 괜찮다. 보수면 어떠냐. 가족과 가정을 살려야 한다.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다.
김병준: 끝으로 한 가지,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은 유교적 전통이 강한 곳이다. 선교를 하면서 마찰이 일어나는 등의 어려운 점이 없었나?
두봉: 걱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유림은 특성상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 손해를 보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또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가톨릭을 박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는 서양 종교를 일종의 침략 수단으로 보았을 때이다. 일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 이후는 다르다. 앞서 말한 추방 명령을 받았을 때도 행여 지역 주민들이 이에 편승할까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더라. 오히려 옳은 일 했다면서 박수를 쳐 주더라.
김병준: 오늘 도착하면서 보니 텃밭을 가꾸고 계셨다. 텃밭이 꽤 넓은데 혼자 다 드시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두봉: 십 분의 일도 못 먹는다. 동네 분들이 가져다 먹는다. 서로 도우며 같이 먹는다. 그래서 밭을 가꾸는 일이 더 즐겁고 우리 모두 행복하다.
사진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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