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대구 서구 평리로)
기억력이 떨어졌다. 예전에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무엇이 그럴까 싶었다. 지금은 내가 증세가 점점 심해진다.
설이 다가오니 아내가 제수품(祭需品)을 사러 시장에 가자고 한다. 내가 직장에 다닐 때는 한 번도 그런일이 없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했기 때문이다. 이제 백수가 되어 돈을 벌어오지 못하니 시장 갈 때마다 아예 짐꾼으로 취급한다. 하던 일을 놓고 마지못해 아내를 따라 칠성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대목장을 보려고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모두 조상에 대한 성의가 대단하다. 가게를 두루 살폈다. 물건들이 형형색색으로 잘 진열되어 있어 볼거리가 많다. 사람마다 물건에만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 먼 산 파는데다 손수레까지 끌고 다니니 몇 번이나 부딪쳤는지 모를 지경이다. 시장에도 가게 중심으로 일방통행이 법제화되었으면 좋겠다.
아내가 물건을 사면 옆에 서 있다 받아서 자루에 넣는다. 아이가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처럼 그저 아내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 된다. 아내는 물건을 살 때마다 가격을 지나치게 깎는다. 보다 못해 제수품은 에누리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옆에 서 있기가 불편해 짐짓 모르는 사람처럼 멀리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수품을 많이 구입했다. 마누라까지 나누어 들었는데도 점점 무거워졌다. 못다 산 것은 다음날로 미루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왔다. 짐을 큰 자루에 나누어 의자에 놓았다. 버스가 곧 온다는 전자안내 자막이 나왔다. 나는 한 손에는 큰 자루, 다른 손에는 비닐봉지를 들었다. 아내가 나를 자세히 보더니 그 비닐봉지가 우리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나는 서슴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내는 "당신은 허리가 아프니 무거운 물건을 들면 안 된다"며 비닐봉지를 자기 자루에 넣었다. 본인도 허약한 체질인데 남편의 건강을 챙겨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다. 차례로 줄 서서 타려고 하는데 어떤 젊은 아주머니가 내 보따리를 잡아당겨 안을 살펴본다. 기분이 몹시 상했다. 자기 것은 어디에 두고 남의 보따리를 넘보나 싶었다. 버스가 출발한 후 아내가 자기 보따리를 확인했다. "이거 갈치네요! 우리 것이 아닙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아내는 나에게 남의 물건은 왜 들었느냐고 야단이다. 조금 전에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화가 난 얼굴로 계속 바가지를 긁어 댄다.
계속 양손에 들고 있었으니 우리의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왜 하필이면 내 보따리 옆에 두었는지 원망스러웠다. 버스 안 사람들의 눈빛은 나를 도둑으로 보는 것 같다. 홍당무가 된 나는 황당하고 할 말이 없다. 주인을 찾으려고 속이 탄 아내는 버스기사 아저씨에게 여기 좀 내려 달라고 부탁한다. 기사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운전만 한다. 정류소가 아닌 곳에서는 버스를 세울 수 없다. 사고가 나면 운전기사 책임이니까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다음 정류소에 급히 내려 두 자루를 나 혼자 양손에 나누어 들었다. 마누라는 비닐봉지를 들고 지나온 정류소로 뛰어갔다. 중간쯤 가니 아내는 봉지를 든 채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온다.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자루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걸으니 팔이 빠질 것 같다. 그렇지만 도둑이 된 처지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아내를 정류소에 기다리게 하고 나는 혼자 생선가게마다 찾아다녔다. 혹 아주머니가 다시 사러 왔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큰 죄를 지은 마음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되돌아왔다. 또 아내의 잔소리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불로소득의 생선을 보고는 반갑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다행히도 제수품은 아니고 반찬용 생선이다. 죄책감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집에 와서 제수품을 정리하였다. 생선 봉지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누라는 버릴 수도 없고, 누구를 줄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불만을 늘어놓는다. 저녁식사 때 생선반찬이 식탁에 올라왔다. '아주머니! 용서해 주세요. 내가 나이 팔십 가까이 되어 정신이 없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 생선 몇 배 이상의 복을 받으세요'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하루가 다르게 정신이 흐려진다. 이러다가 나까지 잊어버릴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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