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조 교수는 경북 구미 출신의 진보 성향 경제학자이다. 1999년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의 단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재벌개혁운동의 선봉에 서 왔다. 2006년 이 감시단 조직이 경제개혁연대로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소장을 맡고 있다. 당연히 이 문제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이자 실천운동가이다.
그의 재벌개혁운동은 현장 중심이다. 학자로서의 이론과 논리만 제공하지 않는다. 장하성 교수 등과 함께 소액주주운동을 펼치는가 하면, 삼성 등의 재벌 그룹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 치열한 공방을 벌이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운동은 여러 가지 점에서 신선하다. 이념이 아닌 현실을 바탕으로 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들이 아닌 소액주주와 같은 실질적 이해관계자들을 묶어 운동의 동력을 삼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존 체제나 법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위에서 재벌들의 잘못된 행위를 따져 나가는 것도 새롭다. 민주화 이후의 시민사회 운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삼성과 헤지펀드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문제로 일전을 겨루는 상황, 이에 대한 분석과 논평에 정신이 없는 그를 광화문 '대한민국 지식중심' 사무실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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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어떻게 컸나?
김병준: 바로 물어보자. 우리나라 재벌들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부자인가?
김상조: 30대 재벌의 자산이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110%나 된다. 물론 자산과 GDP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냥 그 정도로 크고 대단하다는 말이다.
김병준: 어떤가? 흔히 하는 말로, 다들 잘나가고 있나?
김상조: 그렇지 않다. 삼성, 현대차, LG, SK 등 4대 그룹과 신세계, GS 등 이들과 계열분리된 친족 그룹들은 형편이 좋다. 그러나 나머지 그룹들은 그렇지 않다. 일부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필요할 정도로 부실이 심각하다. 결국 4대 가문의 4대 재벌공화국이 되어 가고 있다.
김병준: 다른 나라도 이렇게 몇 개의 그룹에 경제력이 집중되곤 하나?
김상조: 경제 규모가 작은 경우, 또 경제 발전 초기 단계에는 우리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미국도 우리나라 못지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인구 5천만 명에 소득이 3만달러에 이르는 나라에서는 드문 일이다. 우리도 일종의 과도기적 현상이 아닐까 한다.
김병준: 왜 이런 집중 현상이 일어나나?
김상조: 초기에는 정부가 키웠다. 한편으로 통제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의 우산 아래 그 몸집을 불려주었다. 그러다 1987년 이후 민주화와 함께 정부의 통제가 약해지자 그동안 쌓아 놓은 힘을 바탕으로 그 스스로 권력자가 되어 절제되지 않는 성장을 거듭했다.
김병준: 그러다 외환위기가 터지지 않았나. 차입경영으로 덩치를 키우다….
김상조: 그렇다. 민주화와 함께 과거의 관리 체제는 무너지고 새로운 체제는 채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마구잡이 몸집을 불려나가다 외환위기가 터졌다. 문제는 위기를 겪고 나서도 재벌을 제대로 통제하고 이끌 수 있는 적절한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위기를 넘긴 재벌들이 다시 시장과 정치'사회의 거대한 힘이 되어 그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다.
김병준: 비판적인 이야기를 듣기에 앞서 긍정적인 부분이 없는지 먼저 묻고 싶다.
김상조: 암(暗)만 있는 게 아니다. 명(明)도 있다. 경제 발전 초기 단계에서는 기업가정신이 중요한데 이병철, 정주영 같은 분들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했다. 슘페터가 이야기한 이른바 '혁신적 기업가들'이었다. 이들이 일으킨 기업들이 정부의 수출 주도 경제 정책과 보조를 맞추며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김병준: 재벌이 나라를 먹여 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상조: 틀린 말이 아니다. 이들은 성공했고, 한동안 그 과실은 중소기업과 서민들에게 흘러갔다. 이들이 커지면서 일자리가 만들어졌고 국민들의 소득도 올라갔다. 트리클링 다운(trickling down), 즉 낙수효과가 약 30년 지속되었다.
김병준: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김상조: 그때의 성공에 바로 오늘과 내일의 실패가 잉태되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상황에 있어 재벌은 이제 누구도 통제하기 힘든 힘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큰 힘으로 이것저것 다 집어먹는 포식자가 되어 있다.
▷포식자로서의 재벌
김병준: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해 보자. 먼저 글로벌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덩치가 큰 '선수들', 즉 재벌기업들이 있다는 게 장점 아닌가?
김상조: 그렇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텔레콤 같은 경쟁력 있는 기업의 존재는 우리 경제의 큰 장점이다. 재벌개혁도 이들을 없애거나 경쟁력을 훼손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자는 것이다. 이들의 경쟁력은 오히려 더 키워나가야 한다.
김병준: 더 많이 벌고, 그래서 더 큰 기업이 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김상조: 자본주의 사회다. 4대 재벌이든 누구든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돈을 벌어야 고용이 되고 소득도 올라간다. 다만 그 과정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오남용하거나, 그래서 우리 경제의 역동성과 지속 성장의 기반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김병준: 오남용이라 하면?
김상조: 이를테면 협력업체의 기술이나 권리를 탈취하거나 중소기업이나 영세 상인들의 일을 빼앗아 가는 일 등이다. 특히 중소기업의 문제는 우리 경제의 미래가 달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김병준: 좀 더 설명해 주었으면 한다.
김상조: 흔히 우리 경제와 관련하여 샌드위치 위기론을 이야기한다. 선진국은 도망가고 후진국은 따라오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거꾸로 보면 이게 곧 우리의 강점이다. 즉 선진국 수준은 아니지만 믿을 만한 제품을 적당한 가격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김병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김상조: 이런 나라가 잘 없다. 중국만 해도 그렇다. 전 세계 기업들이 중국으로 진출하는데, 중국 본토 안에서는 믿을 만한 부품과 소재를 구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유럽에서 가져오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이런 부분을 우리의 중소기업들이 뚫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 삶이 나아진다. 대기업 고용은 전체 경제인구의 5%도 안 된다. 이들만 잘나가서 뭐가 크게 나아지겠나.
김병준: 그래서 다들 독일 같은 나라를 부러워한다. 중소기업이 대기업만큼 월급도 주고 세계시장을 향한 경쟁력도 가지고 있다.
김상조: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한다. 그런데 재벌기업들이 중소기업의 권리와 기술 등을 탈취하면 어떻게 되겠나. 또 중소기업의 일거리를 빼앗거나 '갑'이 되어 누르면 어떻게 되겠나. 중소기업,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경제 전체의 동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김병준: 소위 '갑질'에 '일감 몰아주기' 등 실제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김상조: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대'중소기업 관계가 쉽게 지배-종속 관계가 된다. 경제 규모가 작아 2, 3개의 대기업이 들어서면 시장이 꽉 차 버린다. 그러다 보니 태생적으로 독과점 구조가 형성되고, 이 독과점 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은 그 앞에 굴종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다.
김병준: 그만큼 더 관심을 가지고 규제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중소기업 정책은 더 적극적으로 하고.
김상조: 대'중소기업 관계를 지금처럼 두면 중소기업이 발전할 수 없다. 당장에 공정거래법의 엄정한 집행을 통해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 정부가 너무 못하고 있다.
김병준: 현 정부 말인가?
김상조: 현 정부는 낙수효과 이론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대기업이 수출을 많이 해야 경제가 산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에 눈을 감는다. 앞의 정부도 똑같았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도 그렇다.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김병준: 다행히 최근 들어 재벌기업들을 포함한 대기업들이 협력업체를 지원하는 등 상생 구도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것으로 보인다. 같이 진화해야 같이 산다는 공진화(co-evolution) 의식이 강해지고 있다.
김상조: 1차 밴드 협력업체와의 관계는 많이 개선되었다. 외국으로 동반 진출해서 같이 성공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아래의 2차, 3차 협력업체들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재벌기업 등이 직접 도와주기도 힘이 든다. 1차 밴드와 2차 밴드 협력업체 간의 거래는 그들 간의 사적 계약이라 계약 당사자가 아닌 모기업이 개입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정거래법상의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지배구조에는 정답이 없다?
김병준: 지배구조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순환출자 등을 통해 겨우 몇 %의 주식으로 그룹 전체를 '황제 경영'하는 것이 맞느냐의 문제이다. 일부에서는 어차피 정답이 없는 문제라는 주장과 함께 투자자와 주주들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이니 외부에서 관심 가질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김상조: 지배구조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그 말이 곧 지금의 지배구조가 정당하다는 뜻도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지금과 같은 지배구조는 분명 문제가 많다.
김병준: 정답이 있는 일이 아닌데도 문제가 많다?
김상조: 우선 지배구조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자. 지배구조는 기업 활동과 관련된 많은 이해관계자들, 즉 대주주, 소액주주, 채권자, 근로자, 소비자 등의 헌신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 성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이건 비민주적이건 이러한 헌신을 이끌어 내면 되는데, 이걸 두고 정답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김병준: 통상 민주적이면 좋다고 하지 않나?
김상조: 꼭 그렇지 않다. 예컨대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민주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최악이었다. 독선과 독단이 심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주기도 했다. 그러고도 성공하고 존경받았다. 왜냐? 그의 열정과 창조성이 이해관계자들의 헌신을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병준: 우리나라 재벌의 지배구조는 독단적이기만 하다?
김상조: 그렇다. 우리나라는 노조가 이기적이다. 왜? 지금과 같은 지배구조 아래에서는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헌신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병준: 그래도 돈을 잘 버는 재벌들이 있다. 성공해서 투자자들과 주주들을 만족시키기도 한다.
김상조: 일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하려면 근로자와 소비자를 포함한 모든 이해관계자들의 헌신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곧 어려워진다. 혼자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전체를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국가도 사회도 이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김병준: 지금도 문제인데 3세 경영체제로 넘어가면 더 큰 문제 아니겠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 등장할 3세 경영 상속자들의 능력이나 정신에 회의적이다.
김상조: 걱정이 많다. 1세와 2세가 지녔던 창업정신과 도전정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고, 그래서 남을 그냥 따라가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실패를 두려워해 안전한 곳으로만 향하는 경향도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서비스업이나 골목상권까지 기웃거리고 하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다.
김병준: 그렇다고 3세 승계를 인위적으로 막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김상조: 막기 힘들다. 인위적으로 혁명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말 하니까 일부에서는 '김상조가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를 인정하는 것 아니냐' 한다. 김상조가 인정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현실은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다. 이런 현실을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당근과 채찍을 제시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김병준: 그게 가능하겠나?
김상조: 이번에 삼성이 당하고 있는 엘리엇 사태도 좋은 자극이 될 수 있다. 엘리엇이 어떤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했건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에게는 좋은 교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들도 이제는 안다. 재벌이나 재벌 집안이 마음대로 포식하는 관행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적절한 자극을 주면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lily_3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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