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잔인한 시대의 아픈 이바구<2>-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최우수상

천황에 90도 절하고, 기미가요 부르고, 황국신민 맹세 뒤 수업

삽화: 이영철 화가
삽화: 이영철 화가

나는 언제나 혼자 외갓집에 갔다. 내가 세 살 들 때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나를 데려왔는데 할아버지 댁과 외할머니 댁은 삼백 미터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할아버지에게는 맏손자요, 외할머니에게는 맏 외손자였으니 어느 곳에서나 나는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외갓집은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외삼촌도 어릴 때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는 혼자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외할머니는 유독 나를 귀여워했다. 나는 매일 외갓집에 갔다. 일제 말엽에서 광복 초기까지 먹는 것이 삶의 최고 가치였던 시절, 외할머니 댁에 가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방 윗목에 가로놓여 있는 널과, 화로 위의 된장 뚝배기였다.

외할머니는 아주 좋은 나무로 널을 만들고 두껍게 옻칠을 하여 윗목에 놓아두고 그것을 앞으로의 안식처로 여기며 소중하게 다루었다. 나는 방안에 들어갈 때마다 무서운 생각이 들어 곁눈으로 그것을 힐끔힐끔 보았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화로 위의 된장이 잿불 위에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면 나의 시선은 저절로 거기로 쏠렸다. 외할머니는 아랫목 작은 이불 밑에 묻어둔 밥그릇을 꺼내어 화로 옆으로 갖다 놓으면 나는 으레 그 앞으로 다가갔다. 외할머니는 치맛자락에 숟가락을 썩썩 문질러 나에게 주면서 많이 먹으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할머니는 나의 얼굴을 보면서 멀리 있는 당신의 딸, 내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된장 속에 들어있는 굵은 멸치며, 호박고지며 무말랭이가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밥을 다 먹을 동안 외할머니는 줄곧 나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어미 보고 싶지 않으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것은 괜히 나의 외로운 마음을 건드려 우울하게 만들까봐 염려가 되어서였다.

사실 나는 너무 일찍 부모와 떨어져 있다 보니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얼마나 좋은지도 모르고 할머니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만 생각했다.

외할머니는 내가 밥을 다 먹고 집으로 가려고 하면 꼭 5전짜리 동전 한 닢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군고구마를 사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것을 야끼이모라는 일본어를 썼는데 그것이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외할머니께 무엇이든 갖다 드리고 싶었지만 갖다 드릴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때는 성냥이 귀해서 유황으로 만든 불쏘시개를 많이 썼는데 나는 이것을 만들어 가져다 드렸다. 시장에 파는 유황을 사서 불에 녹여 나뭇개비 끝에 묻히면 불쏘시개가 되었는데 이것을 몇 움큼씩 만들어 갖다 드렸다.

우리집은 흙담이 낮아 앞집 안이 훤히 다 보였다. 나는 키가 작아 뜰 위나 방안에서 내려다보면 앞집 마당이 겨우 보였는데 고학년이 되면서 마당에서 발돋움만 하면 앞집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지를 다 알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는 한 반에 있는 봉선이가 살고 있었다. 나는 소심하여 한 번도 그와 말을 주고받질 못했지만 그만 보면 자꾸 마음이 쓰이곤 했다. 온 동네 아이들이 집집마다 모여 남자 아이들은 막대놀이나 구슬치기를 하고,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넘기나 공기놀이를 하곤 했는데 봉선이는 여기에도 섞이지 않았다. 짓궂은 남자 아이들은 고무줄놀이 하는 여자 아이들에게 끼어들기도 하고, 꼬챙이로 치마를 훌쩍 들어 올리고는 도망을 쳤다. 여자 아이들은 악을 쓰며 이구동성으로 욕을 해댔다.

"문디 자석 지랄병하고 있다!"

그러나 앞집 봉선이는 놀이하는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밖에 나돌아 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집 어른들도 이웃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말다툼을 하는 걸 보지 못했다. 우리집에서 내려다본 그 집은 언제나 조용하고 일상생활은 어느 집이나 똑같았지만 말수는 아주 적었다. 앞집에는 봉선이 할아버지 내외분과 부모님 그리고 오빠와 여동생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외출이 없고 말수가 적었다.

한 번은 많은 비로 앞집과 우리집 사이의 흙담이 무너졌는데 그것을 보수하는 과정에서도 무슨 의논 같은 것도 없이 조용히 원상대로 회복시켜 놓았다. 동네가 가끔 시끄럽게 움직일 때도 있어 이웃끼리 사소한 일로 큰소리를 내고, 아이들 문제로 싫은 소리가 오고 갔는데 이집만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이 감돌았다. 그들이 조용히 사는 모습은 어느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에 나가면 혼자 있을 때가 많았는데 뜰에 혼자 벽을 기대고 서서 봉선이네 집을 내려다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어쩌다 봉선이 모습이 보이면 정신이 바짝 나서 그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그 고요한 집에 동네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다 모여 드는 일이 벌어졌다. 태평양 전쟁이 격렬해지고, 미국군에 밀리기 시작한 일본군은 병력 소모가 많아지자 조선의 청년들을 징집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워낙 점잖고 모든 일을 순종하는 집이 되다보니 봉선이 큰 오빠를 제일 먼저 징집해 가게 된 것이다. 무운장구를 비는 깃발이 긴 장대에 매달려 펄럭이고 있는 가운데 동네 사람들이 송별 인사차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집 안에 들어가 봤다. 멀리서 본 것 보다 마당은 넓고 집도 초가집이지만 널찍해서 보기 좋았다. 봉기 오빠는 무운장구라고 쓴 어깨띠를 두르고 서 있었다. 무운장구라고 수놓은 어깨띠는 천인침이라고 해서 천 사람이 한 땀씩 수를 놓아 만든 것으로 그 수만큼 명이 길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봉선이가 눈물을 연신 훔치고 있었다. 나는 봉선이가 우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금세 눈시울이 아려왔다.

봉선이 오빠는 비봉산에 있는 신사 앞에서 입영 환송회에 하고는 남양군도 전선으로 떠났다. 그가 떠날 때 군청에서 그에게 쥐어준 것이라곤 '갓데 구루조또...'라는 유행 군가를 불러준 것뿐이었다.

3. 마실

집집마다 거의 단칸방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한방에서 거처하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저녁을 먹고 나면 잘 때까지 비좁은 방안에서 온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무척 힘겨웠다. 아이들은 서로 다투고, 어른들은 일일이 나무라는 데도 지쳤다. 그것은 좁은 감방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자연히 마실 나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모이는 장소는 어른이 없고, 여유 방이 있는 집이 우선이 되었다. 태산이 집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건너 방이 언제나 비워 있어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모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장소가 하나뿐이니 나이 차이를 구분할 수 없이 많게는 10여 명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호롱불 하나를 가운데 두고 닭이 울 때까지 놀 때가 많았다.

재미있는 이바구(이야기)가 단연 모임의 주제가 되고, 그 이바구는 옛이야기에서부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시사까지 다양했다. 귀신 이야기를 듣고 어슥한 밤중에 집으로 돌아갈 때는 컴컴한 구석에서 머리 푼 여자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아 몸서리를 쳤다. 집집마다 석유기름을 아끼느라 불을 끄고 일찍 자므로 골목길은 언제나 캄캄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 나무둥치 밑을 가랑잎이 쓸려가는 소리가 나는 겨울밤은 정말 무서워 머리끝이 쭈뼛했다.

태산이 큰 삼촌은 일본으로 돈 벌러 가고, 둘째는 만주로 갔다. 어쩐 일인지 스무 살 쯤 되는 둘째 삼촌이 만주에서 일 년을 못 채우고 돌아왔다. 밤이면 태산이 집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모였다. 태산이 삼촌의 만주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마적단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그는 그것이 독립군이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을을 쳐들어오는 것은 모두 마적이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직접 보지는 못하고 들은 이야기라고만 했다. 가끔 그 이야기 속에 김일성 장군 이야기도 섞여 나오고, 관동군 이야기도 나왔지만 독립군 이야기는 전연 하지 않았다. 마적단 이야기를 할 때는 방문을 열고 밖에 누가 있는가 조심스레 살펴보기도 했다.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마적단이 동네를 쳐들어오면 양식을 빼앗아 가기도 했지만 때로는 젊은 청년을 데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군도 김일성 장군은 겁을 냈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아주 작은 소리로 말을 했다.

가끔 그도 잘 모르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미국에는 이승만 박사가, 중국에는 김구 선생이라는 조선 사람이 있다고 이름만 말할 뿐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나도 학교에서 미국의 도루망(트루만), 영국의 차치루(처칠) 중국의 쇼카이세키(장개석)을 원수로 저주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구체적 내용은 잘 몰랐다.

아침 전교생 조회 때는 일본인 교장이 단위에 올라가서 긴 훈화를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러나 조회 때마다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그 말이 저절로 외워져 기억에 뚜렷이 남았다.

「아노 니쿠이 니쿠이 아메리카또 이기리쓰오,,,,, 저 밉고 미운 미국과 영국을 물리치고, 대동아권의 평화와 대일본제국의 승리를 이끌어야 한다.」

대충 이런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침마다 들어 귀에 못이 박혔다. 이러한 교장의 충성스런 용어들을 조선인 선생이 일본인 선생보다 더 열을 내어 강조했다. 아이들에게 일본말만 쓰도록 하고, 조선말을 쓰는 것을 발견하면 심한 체벌을 가했다. 오히려 더 심하게 독려하는 선생은 조선 선생이었다. 나중에 안 일지만 그렇게 충성심을 보이지 않으면 사상을 의심 받게 되고, 전쟁터로 지원해가게 만들었다고 했다.

내가 2학년이 되자 담임이 바뀌었다. 조선인 다케다(竹田) 선생이 담임이 되었다. 그는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교실 맞은 편 벽에는 한가운데 일장기, 왼쪽에는 일본천황의 궁궐 입구에 있는 다리, 니주바시(이중교 二重橋)와 오른 쪽에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 제독이 큰 배 갑판 위에서 쌍망원경을 눈에 대고 멀리 적군은 바라보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교단 위에 올라설 때마다 일장기와 이중교를 향해 공손히 절을 했다. 그리고 덴노헤이카(천황폐하)라는 말을 할 때마다 차렷 자세를 하여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일본말이 서툴고 일상용어를 다 익히지 못하여 조선말이 튀어나올 때는 가차 없이 손찌검부터 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성분을 분류할 때 실력을 따지는 일은 없고, 무서운 선생, 순한 선생 혹은 못된 선생, 착한 선생으로 나누었다. 일본 선생 중에는 요코다 여선생이 아주 못되어 무서웠다. 그가 너무 못되게 굴어 아이들은 모두가 그를 미워했다. 자기반 아이가 아니라도 등교 시간에 늦은 이이들을 복도에 세워놓고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다. 나도 몇 번 맞았다. 종일 손끝이 화끈거리고 아려서 애를 먹었다. 대부분 아이들이 해 시계를 보고 등교하여 지각하거나, 이십 리나 되는 먼 곳에서 다니는 아이들이 늦게 와서 손바닥을 맞았다.

5, 6학년 학생 중에는 장가까지 간 어른들이 섞여 있었는데 아이들이 요코다 선생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그가 변소에 가는 것만 보면 변소 통속에 큰 돌을 던져 똥물이 튀어 오르게 했다. 그때 학교 변소는 목조 건물로 구멍 뚫린 나무 사이로 용변을 보고 그 밑에는 분뇨 통이 깊었는데 여학생이 많이 이용했으므로 언제나 오줌이 긍하게 차 있었다. 분뇨 통을 가리고 있는 나무 가리개는 언제나 열려 있어서 거기다 큰 돌을 던지면 변소 안에서 볼일을 보는 이가 똥오줌 벼락을 맞게 되어 있었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은 천하의 요코다 여선생도 너무 창피해서 어디가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용변을 보고 나와 범인을 잡으려고 살펴보지만 이미 그 학생은 사라지고 없다. 그는 그 부근에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아무 말도 못하고 직원실로 들어가곤 했다.

태평양전쟁은 점점 더 격렬해지고 학교에서는 준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모두 국방색 옷을 입게 하고, 모자는 센토모(전투모)를 쓰게 했다. 다리에는 게도루(긴 천으로 감는 각반)를 쳐서 군인들과 똑 같은 모양을 했다. 그러고는 매일 사열을 했다. 군인처럼 행진을 하면서 교장에게 고개를 돌려 목례를 하게 했다. 신호나팔로 행진곡을 불면 그 소리에 맞추어 행진을 하고 단상에 있는 교장 앞에 다다르면 호초토레(발맞추어 가)를 하면서 '우로 봣'하는 구령에 모두 고개를 돌려 교장을 쳐다봐야 한다.

행렬은 키가 큰 아이가 앞에 서서 성큼성큼 걸어가기 때문에 키가 작은 아이들은 거기 따라가기가 무척 힘들었다. 또 호초토레는 다리를 높이 들고 무릎을 직각으로 굽혀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따라가려고 동동걸음을 치다가 발도 맞지 않고 걸음도 따라가지 못하여 결국 열외로 잡혀 나가 얻어터졌다.

이때 잘못하는 반은 운동장에 꿇어앉아 기합을 받았다. 뙤약볕은 사정없이 내려쬐는데 선생들은 아이들에게 가혹하게 굴어 일본 교장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특히 2학년 2반 담임 다케다 선생은 때를 만난 듯 설쳐댔다. 그는 입버릇처럼 소리쳤다.

"조센징 쇼가나이(조선인은 할 수 없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 소리만은 참으로 듣기 싫었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지도 조센징이면서..."

다케다 선생이 3학년까지 따라오면서 담임이 되자 우리는 또 죽었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는 일본 선생보다 더 가혹하게 우리를 황국신민으로 들볶았고, 우리는 철저하게 신민의 행동을 이행해야 했다. 아침에 해시계를 보고 일찍 학교로 갈 때는 우선 복장이 국방색 옷, 전투모, 게도루(각반)를 갖추어야 하고, 동네별로 반을 짜서 열을 지어 학교로 향했다. 인솔은 상급생이 했다. 면사무소 앞을 지나고, 주재소 앞을 지나면 멀리 비봉산 중턱에 설치되어 있는 신사를 향해 절을 하고 가야 했다. 학교 교문에는 복장을 검사하고 봉사 활동으로 망태에 담아온 솔 괭이나 솔방울을 교문 옆에 비워놓아야 했다.

교실에 들어가면 아침 청소를 해야 한다. 전날 하교할 때 청소를 했지만 창문을 모두 열고, 책상을 닦아 새로운 기분이 들게 했다. 수업 시작종이 치면 급장이 제일 먼저 궁성요배(宮城遙拜) 구령을 불렀다. 그것은 천황이 사는 동쪽을 향하여 90도 경례를 올리는 의식이다. 우리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큰 절을 했다.

우리는 다시 교실 정면을 향해 서고, 니주바시 즉 일본 천황이 거처하는 황궁 입구에 있는 이중교 다리를 향해 또 절을 했다. 그리고 기미가요 일본 국가를 불렀다. 노래는 한 자도 틀리지 않게 불렀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 하나도 몰랐다. 무슨 바위가 된다는 단어는 겨우 알겠는데 전체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연 모르면서 매일 아침 큰 소리로 불렀다.

다음에는 '고코쿠 신민노 지카이' 즉 황국신민에 대한 맹세를 복창했다.

1.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쳐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 하겠습니다.

3. 우리들은 고통을 참고 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상급생과 어른들은 '황국신민의 선서'를 제창했는데 우리가 하는 맹세보다 용어가 조금 더 어려웠다.

다케다 선생은 일본군 총사령부의 대본영(大本營) 발표를 요약하여 현재 일본군의 전황을 소개하고, 남양군도에서 전사한 장병들에 대한 묵념을 시켰다. 복도를 지나가던 다니 교장은 이 열성적인 다케다 선생의 교육 방식에 만족감을 표하면서 교실 안을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다. 우리 반 교실은 복도 창문을 꼭 한가운데에 모아 열어 놓고, 교장이 지나갈 때 잘 보이도록 준비를 철저히 해 놓았다. 우리는 찬바람이 들어와서 몹시 싫었지만 다케다 선생은 닌쿠단렌(忍苦鍛鍊) 즉 괴로움을 참고 단련해야 한다며 좀처럼 문을 못 닫게 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군가를 가르쳤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군가는 '군함 행진곡'이었는데 세계 3대 행진곡에 들어간다고 했다.

지키는 것도 공격하는 것도 강철과 같이

떠오르는 성처럼 든든하도다.

떠오르는 그 성, 태양의 근본인

황국의 사방을 지켜야 한다.

강철의 그 함선은 일본의

적이 되는 나라들을 섬멸할 것이리.

그는 2절을 건너뛰고, 3절을 슬프게 불렀다. 3절은 일본국가 '기미가요' 곡과 비슷하여 은은하게 느린 단조 음으로 사람의 마음을 비장하게 쥐어짰다.

바다에 나가면 보이는 시체

산에 나가면 풀이 자라는 송장

천황의 곁이라면 죽는 것도

편안히 죽을 수 있으리

우리는 무슨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그의 노래를 끝까지 경청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우리들까지 슬픔에 젖게 했다. 그는 일본인보다 더 일본의 제국주의 혼에 빠져 있었고, 어느 유행가 끝 소절에 나오는 '천황폐하를 위한다면 어떤 생명인들 아깝겠는가.'를 입에 달고 다녔다.

그는 가끔 벽에 걸린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사진을 가리키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이고 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미국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의 군함, 비행기, 군인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일본 함대는 배 한 척의 손상도 없이 돌아오게 한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그의 이름 이소로쿠(五十六)는 그의 아버지가 56세 때 그를 낳았다고 지은 이름이라 했다.

다케다 선생의 행동과 말은 참 무서웠다. 우리의 머릿속에다가 천황폐하가 온통 차지하게 하여 우리의 소중한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쳐야 하는 것으로 믿게 했다.

집집마다 세간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도 안방 벽에는 가미다나(神棚)를 꼭 모셨다. 가미다나는 제사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로서 신을 모시기 위한 제물상이다. 일종의 소형 사당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집 큰방 벽에도 가미다나를 설치해 놓고 아침저녁으로 두 손을 모아 손뼉을 두 번 치고, 큰 절을 올렸다. 어쩌다 잔치 떡이라도 생기면 그 떡을 가미다나에 올려놓고 감사의 절을 올리고 난 뒤에 먹었다.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조금도 틀림이 없이 일본정신으로 열심히 공부하려고 마음먹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들, 하얀 백지에 일본 색을 칠하면 일본 그림이 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면 꼴 뜯으러 가는 것이 일과였다. 동무들과 같이 우선 들로 나간다. 어떨 때는 멀리 감천가 기슭에 있는 동산까지 가기도 했다. 동산은 알봉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낙동강으로 흐르는 감천 냇가에 아담하게 우뚝 솟은 조그만 산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임금이 도읍지를 찾아 순행하다가 선산읍에 당도했는데 이곳이 보기에 도읍지로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다가 산곡을 헤어보니 백곡에서 일곡이 부족한지라 애석하게 여겼는데 하늘에서 산이 하나 내려오고 있었다. 이것을 본 동네 처녀 하나가 방정맞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지금 동산 자리에 홀로 떨어져 산곡이 되지를 못했다고 한다.

동산에서 감천강 다리까지는 한 마장이 넘는데 여기까지 와도 해는 아직 중천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강둑은 무척 길었다. 우리는 지겹도록 걷는다. 꼴망태를 매고 세월없이 둑을 걷는데 다리가 아프다거나 지루하다는 생각은 전연 들지 않았다. 태산이 조환이는 나와 동갑이고 이웃에 산다. 학교는 입학시험에 한 번 떨어져서 나보다 한 학년 아래가 되지만 언제나 함께 나무하러 가고, 꼴 뜯으러 가니 형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무슨 일을 해도 즐거웠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둑 위에는 큰 뱀 한 마리가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무척 크고 배가 불룩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돌멩이부터 주워 와서 뱀을 향해 던졌다. 뱀은 돌을 맞으면서도 빨리 달아나지를 못했다. 자세히 보니 배가 너무 불러 거동이 어둔했다. 우리는 뿔룩한 배가 궁금했다. 조환이가 뱀 대가리를 돌로 누르고, 나는 불룩한 배를 밑으로 훑어 내렸다. 아랫배 밑구멍으로 아주 작은 새끼 뱀이 빠져나왔다. 모두 열다섯 마리나 되었다. 그 새끼들이 둑 밑 풀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우리는 무슨 죄를 지은 것 같아 새끼 뱀이 가는 대로 그냥 두고, 어미 뱀도 둑 밑으로 밀어 넣었다.

뒤에 알았지만 독사는 새끼를 낳고, 구렁이는 알을 낳는다고 한다. 큰일 날 뻔 했다. 새끼를 낳기 직전의 독사가 얼마나 사납고 독을 많이 품고 있었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반바지 차림으로 맨발이었고 뱀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였다. 어린 것들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고난 팔자가 갈림길에서 생사의 방향을 정해주고 있는 것 같다.

감천강은 김천에서 흘러 내려와 선산면을 지나서 해평면으로 흐르다가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간다. 감천 다리는 선산에서 구미로 가는 신작로에 세워져 있다. 다리를 건너면 고아면이다. 다리는 길고 멋스러워 다리를 건너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내가 구미에서 태어나 3살 때 선산으로 올 때는 버스가 나무다리 위를 지났는데 지금은 콘크리트로 새로 세워 웅장하고 보기 좋았다.

우리는 하릴없이 그 긴 다리를 한 번 건너보곤 다시 돌아와 급히 풀을 뜯었다. 망태가 작아 거기에 풀을 꼭꼭 눌러 채워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해가 서산으로 많이 기울어 햇살이 별로 뜨겁지 않았다. 모자도 없이 매일 들로 산으로 쏘다니다 보니 얼굴은 새까맣고 맨발은 살이 굳어져 흙길을 걷는 데는 어떤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감천강 다리에서 우리집까지는 신작로를 따라 걸어가면 그리 멀지 않아 좋았다. 둑에서 신작로로 들어서는데 구미면에서 오는 버스가 다가온다. 자갈길을 빨리 달리지 못하여 천천히 가는 버스 창을 유심히 쳐다본다. 혹시 아버지가 거기 탔는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철도 제복을 입고 테를 두른 모자를 써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관리 냄새가 났다. 버스에 탔으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복장이다. 천천히 지나가는 버스 안을 뚫어지게 봐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는 언제나 무엇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했다. 태산이와 조환이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풀 베던 낫으로 가로수도 찍어보고 길가에 자라고 있는 쑥대를 낫으로 쳐보기도 하면서 세월없이 가고만 있다. 우리들의 풀베기 작업은 언제나 놀이처럼 장난이 섞여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걸어가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돌멩이 하나라도 집어던져야 속이 후련했다. 개구리나 뱀을 보면 돌부터 던졌다. 쓸데없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데도 그것이 재미있고, 그런 가운데 우정은 더욱 두터워졌다.

4. 말탄 군수

학교 옆문을 나오면 군청 정문 앞 넓은 길이 나오고, 큰 길 옆에는 우체국이 서있다. 나는 정문보다 가까운 옆문으로 들어가서 곧장 교실로 간다. 우뚝 선 군청 청사는 크고 높아 위엄이 있었다. 멀리서 봐도 이층 벽 위에 붙여있는 선주부(善州府)라는 큰 현판 글씨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 현판을 볼 때마다 위엄에 눌려 약간 겁이 나기도 하고 존경심이 우러나오기도 했다..

젊은 청년 군수가 새로 부임했다.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한 스물 대여섯 되는 청년으로 그가 부임하자 그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대학에서 공부를 잘하여 재학 중에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했다고 한다. 졸업 후에 군수로 발령을 받아 선산군에 부임을 하는데 너무 젊고 학생복을 그대로 입고 와서 직원들이 군수인줄 몰라 큰 실수를 했다고 한다. 그는 말을 잘 탔다. 아이들은 군수가 말을 타고 출퇴근을 하거나 관내를 시찰하는 모습이 신기하여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때 선산면에는 구미와 김천으로 왕래하는 버스만 있었고 승용차는 한 대도 없었다. 물론 군청이나 선산주재소에도 승용차는 없었고, 자전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군청은 선산면에 있었고, 경찰서는 구미면에 있었는데 경찰서에는 차가 있었다. 군수는 조선 사람이고 서장은 일본 사람이었다. 말은 교통수단이 될 수도 있었지만 승마용은 부잣집 아들들이나 타는 사치품이었다. 못사는 농부들의 아이들은 말을 타고 지나가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시기심과 소외감으로 언짢은 생각만 들었다. 서민들은 그 꼴이 눈에 거슬려 노래처럼 장단을 맞춰 욕을 했다.

"말 탄 놈도 끄덕, 소탄 놈도 끄덕 지애비 ×도 끄덕."

한풀이를 하는 말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부자나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가차 없이 욕이 돌아갔다. 특히 서울 사람에 대한 저항심이 무척 컸다.

"서울 놈들은 똥끼에(똥구멍) 나팔 달고 다닌다나?"

젊은 군수가 말을 타고 다닌다는 것은 선산군청이 생기고는 처음이라 했다. 그러나 그가 조선 사람이고, 젊은 청년이라는 데 많은 기대감을 가졌다. 그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2학년에 올라오고부터 담임이 바뀌어 우에노 선생을 자주 볼 수가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졸라서 얻은 달걀 한 꾸러미를 우에노 선생 집에 갖다드렸다. 우에노 선생은 무척 고마워하면서 동전 50전을 꼭 쥐어주었다. 나는 선생님이 보고 싶을 때는 계란을 들고 찾아 갔다. 나는 선생님 방안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 하고 절만 크게 하고 돌아왔다. 그도 별 말은 없었지만 나만 보면 꼭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올 때는 꼭 계란 값을 쳐주었다.

이날도 선생님이 보고 싶어 계란 한 꾸러미를 들고 선생님 댁으로 갔다. 집은 일본 소학교 옆에 밀집한 아담한 일본식 집이었는데 한국식 담은 없고 울타리로 측백나무를 심어놓았다.

이날은 이상하게도 그 울타리 옆 가로수에 말이 한 마리 매어 있었다. 나는 그 말이 군수의 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우에노 선생의 문 앞까지 갔지만 기척을 할 수가 없었다. 창문은 훤히 열려 있었고 방안에는 군수와 우에노 선생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생은 다소곳이 앉아 고개를 숙이고 묻는 말에 대답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창문을 활짝 열어 밖에서 방안을 훤히 들여다보이게 한 것도 우에노 선생의 방어적 자세로 보였다.

나는 군수에 대한 미운 생각이 머리 위로 치솟아 올랐다. 계란을 현관 문 앞에 그냥 두고 나오려고 하는데 나를 본 우에노 선생이 큰 소리로 불렀다.

"니시하라, 니시하라군!"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선생님!"

그는 슬리퍼를 끌면서 밖으로 나온다.

나는 갑자기 우에노 선생을 만나는 것이 싫어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나는 나무에 메어놓은 말고삐를 풀었다. 그리고는 고삐로 말 엉덩이를 내려쳤다. 말은 훠어엉 소리를 지르더니 어디론가 달아났다. 군수가 말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어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집에 돌아온 나는 우에노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공책을 찢어서 서툰 일본말로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적었다. 군수가 미웠다는 말도 썼다. 이튿날 일찍이 직원실에 들어가서 우에노 선생 책상 위에 편지를 얹어 놓았다. 하교 시간이 되자 우에노 선생이 나를 불렀다. 그는 직원실에 온 나를 복도로 데리고 나가더니 돈 50전을 내 주머니에 넣어준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꼭 껴안는다. 나는 난생 처음 겪는 일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마를 있다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만 가보라고 했다. 내가 우에노 선생을 쳐다보니 그의 눈이 젖어있었다. 나는 깊숙이 절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분 좋은 며칠이 지났다. 그날 저녁은 달이 유난히 밝았다. 찢어지게 큰 그 달의 모양이 꼭 우에노 선생의 얼굴 같았다. 갑자기 우에노 선생이 보고 싶었다. 선생님 집으로 갔다. 문 앞에는 또 군수의 말이 메어 있었다. 나는 방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말고삐를 풀고 엉덩이를 내려쳤다. 그때 나무 그늘에 숨어서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순사가 달려 나와 나를 꼭 붙들었다. 그는 다짜고짜 나의 목 위를 후려치더니 방안을 보고 소리를 지른다.

"군수님! 나쁜 놈 붙잡았습니다."

나는 선산주재소로 붙들려 갔다. 긴 칼을 찬 순사는 나를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히더니 욕부터 해댄다.

"요 조그만 놈이 어디 군수님의 말을 훔쳐가려고 해!"

순사는 사정없이 때리다가 발로 차면서 온갖 욕을 다 퍼붓는다. 바가야로 하는 일본말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이 광경을 보던 주재소 경부는 아직 어린놈이니 조서만 작성하고,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덧붙여 학교장에게 통보하라고 지시한다.

나는 분하고 슬픈 생각이 가슴을 치고 올라와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내가 헛소리를 하며 소리 내어 우는데 할아버지가 놀라 나를 깨웠다. 할머니도 내 손을 꼭 잡고 내 이름을 자꾸 불러댔다. 눈을 뜨니 문풍지가 훤히 밝게 보였다. 벌써 날이 새고 있었다.

우에노 선생은 나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는 매일 미국 비행기의 공습이 있었고, 큰 도시의 주민들은 폭격이 없는 시골로 소개하도록 권고하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일본에 있는 부모가 전쟁이 점점 더 위험하고 불리하게 전개되니 딸 우에노 선생을 불러 들였다고 한다. 우에노 선생은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먼 이국땅에서 지내고 있으니 부모의 걱정이 오죽 했겠는가. 우에노 선생도 그의 미모나 청순한 행동에 관심을 가지는 학교 동료 선생이나 외부 인사까지도 그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무엇보다 사범학교에서 배운 대로 또 청순한 그의 심성대로 불쌍한 한국 아이들을 오직 교육 이념으로 가르친 것이 교장의 미움을 샀다. 그것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고민을 안고 나에게도 한 마디 말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린 것이다. 그에게는 무언이 최고의 위안이요 떠나는 이유로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밤만 되면 우에노 선생이 보고 싶어 눈물을 적셨다.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나의 슬픈 마음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불을 끄고 자다가 나 혼자 눈물을 흘렸다. 이상하게도 그런 날 밤에는 꼭 우에노 선생이 꿈에 나타났다. 날이 새면 그날은 온종일 우울했다.

5. 태평양 전쟁

다케다 선생은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하면서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개전일을 신주 모시듯 했다. 시간만 나면 아이들에게 자랑을 했다. 일본말로 그 날짜를 '쇼와 쥬로쿠낸 쥬니가쓰 요우까(昭和 16年 12月 8日)'라고 하며 저의 조상 제삿날처럼 섬겼다. 그는 세계지도를 칠판 위에 걸어 놓고 태평양뿐만 아니라 만주, 중국대륙 그리고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이 있는 남태평양 일대를 전황 보고하듯 큰 소리로 일본군이 선전을 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360여 대의 항공기가 새벽 공기를 뚫고 2패로 나뉘어 날아올랐다. 이 항공기들은 진주만에 있는 거대한 미국 해군 기지로 들어가 공격했다. 이 기지에는 미국 전투함 70여 척과 보조함정 24척 그리고 300여 대의 항공기가 있었다. 순양함 3척과 구축함 3척, 기뢰 부설함 1척을 비롯한 수많은 함정이 파손되었고, 180대가 넘는 항공기가 파괴되었다. 2,000명을 넘는 장병이 죽었고, 부상자도 1,000명이 넘었다. 그러나 당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은 바다에 나가 있어서 피해를 면했고, 이 항공모함들은 그 후 미국 해군의 초기 태평양 방위체제에서 핵심이 되었다. 일본이 예고 없이 감행한 진주만 기습공격은 미국국민을 단결시켰고, 미국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말끔히 없애게 되었다. 그날 미국의회는 즉각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진주만을 공격한 바로 그날, 타이와에 기지를 둔 일본 폭격기들은 필리핀에 있는 클라크 군용비행장과 이바 군용 비행장을 공격했다. 미국 극동군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의 반 이상이 파괴되었다.

맥아더가 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전속되어 떠나고 비타안 방어를 조너선 M. 웨인라이트 중장에게 맡겼는데 그와 그의 부하들은 4월 9일 일본군에 항복했다. 코레히도르 섬은 5월 5, 6일 밤에 함락되었고, 필리핀 남부는 3일 뒤에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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