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입구)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밴드 '신촌블루스'가 2집 앨범 '황혼'(1989)에 수록한 곡이며 당시 멤버였던 김현식이 불러 유명해졌고 이후 수많은 후배 가수들이 다시 부른 명곡이 있다. '골목길'이다. 골목길을 노래한 수많은 곡이 있지만, 노랫말만 봐도 골목길의 매력을 가장 잘 표현한 곡이다. 저 부분이 특히 그렇다.
입구에 접어들 때부터 설렘과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골목을 대구에서는 두 곳 들 수 있다. 밤이면, 특히 주말 밤이면 젊은이들을 가슴 뛰게 만드는 '현재 대구 제일 번화가' 동성로 로데오 골목과, 젊은 세대 못지않게 밤을 불태울 줄 아는 노년들의 유흥 집결지인 '왕년 대구 제일 번화가' 향촌동 골목이다. 수십 년 차이 나는 향유층을 두고 경계 지어지는 두 골목은, 실은 같은 세월 속에 있다. 가슴 뛰는 일에, 노소(老少)가 어디 따로 있나.
'대구는 골목길 도시다' 기사를 20회 동안 연재하며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정리했다. 계산해보니 그동안 7만6천737자의 기사를 적었다. 사진은 무식하게 셔터만 눌러대 딱 2천500장을 찍었고, 그중 가뭄에 콩 나듯 봐 줄 만하게 찍힌 사진만 겨우 골라 게재했다. 그래도 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지면을 마련했다.
◆꿈에서 찾아 헤매던 골목을 현실에서
기사 연재를 시작(4월 7일)하기 3개월 전부터 대구의 골목길 곳곳을 돌며 사전 답사를 했다. 그러면서 기사 연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 신경을 많이 썼다. 결국 골목길이 꿈에 나타나 탐험에 나선 적이 몇 번 있다. '군대 다시 가는 꿈'보다 더 무서운 꿈이 '일하는 꿈'이 아닐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이 있다. 3월 6일 새벽이었다.
꿈속이라 그런지 한국과 (아마 무협영화에서 보았을) 중국과 (아마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았을) 일본의 문화 요소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기사 소재로 간절히 찾던 도심 속 옛 우물이 나왔다. 좀 더 걷자 눈앞에 오래된 2층 객잔(중국의 여관)이 나왔다. 객잔을 지키는 중국 청나라 복장인지 일본 전통 복장인지 알 수 없는 차림의 노부부를 만났다. "와! 아무도 모르는 대구의 숨은 골목길을 발견했다"며 탄성을 지르고는 마구 사진을 찍고 노부부와 길게 인터뷰도 했다. 하지만, 꿈이었다.
그런데 이때 꿈속과 비슷한 풍경을 몇 달 후 발견했다. 5월 22일 낮이었다. 정확한 위치는 밝히지 않겠다. 꿈속처럼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걷다 객잔이 아닌 오래된 여관 건물과 마주쳤다. 2층인 데다 건물이 푸른 잎들로 뒤덮인 것까지 꿈속과 흡사했다. 아찔했다. 하지만 추가 취재는 할 수 없어 사진 한 장만 남겼을 뿐이었다. 이 골목은, 낡고 오래돼 결국 사라져가는 대구의 미로골목 중 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허물 벗고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골목 생태계
사라져가는 골목이 있는 반면, 새로 태어나는 골목도 있다. 즉, 골목은 늘 변화한다. 골목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것도 변화의 모습이지만, 시대 흐름에 맞춰 골목 스스로 모습을 꾸준히 갱신하는 것도 변화상이다. 번화가에 가면 업종 유행에 따라 간판을 1년에 두어 번씩 바꿔 다는 가게가 여럿 있다. 건축 기술의 발달로 불과 몇 달 전에도 있었던 건물이 헐리고 새 건물이 뚝딱 지어지는 일은 다반사다.
그래서 '대구는 골목길 도시다' 기사가 나간 후 얼마 되지 않아 해당 골목이 기사 내용과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일도 생겼다. 몇 가지 소개한다. 9회 '오래된 작은 골목'(6월 9일)에서 소개한 대구 중앙로 옆 '쟁이 골목'은 6월 27일 자로 사라졌다. 이날 골목의 상징인 펍(선술집) 겸 라이브클럽 '쟁이'가 동성로로 이전한 것. 명소 골목이 사라졌다고 해서 서운해할 일은 아니었다. 쟁이는 동성로에 있는 '클럽 얼반'과 '라이브인디' 등 가까이 있는 다른 라이브클럽들과 함께 가칭 '동성로 라이브 클럽 골목'을 형성하게 됐다.
12회 '골목을 잇는 다리-하'(6월 30일)에서는 동네와 동네를 연결하는 골목길 다리로 우리에게 친숙한 육교를 다뤘다. 1973년에 함께 설치된 대구 최초의 육교인 신암육교와 대현육교를 조명했다. 그런데 이후 대현육교가 철거돼 주민들의 기억으로만 또 사진으로만 남게 됐다. 평화시장 닭똥집 골목 옆 신암육교는 아직 그대로 있다.
3회 '버스킹 골목, 동성로'(4월 21일)에서는 대구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동성로의 버스킹(거리 연주) 명소들을 소개했다. 가장 유명한 곳이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 중앙광장 무대인데, 이곳은 최근 야간 상설공연장으로 조성됐다. 이곳에서 대구시는 이달부터 12월 3일까지 매주 한두 차례씩 모두 15차례에 걸쳐 다양한 장르의 거리공연을 연다. 어쿠스틱 및 록 밴드 공연을 비롯해 연극, 클래식, 랩, 비보잉 등 다채로운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젊은이들은 미로골목을 좋아해
요즘 젊은이들이 애용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중 하나인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 주제나 단어 검색을 용이하게 만든 꼬리표)로 '골목길'을 검색해 봤다. 사용자들이 아마도 대부분 여행길에 들렀을 국내 및 해외에서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골목길 사진 3만9천139건(2015년 9월 4일 오후 7시 48분 기준)이 떴다. 놀랐다. 6'7'8회 '소박한 삶의 공간, 미로골목 상, 중, 하'(5월 19일, 5월 26일, 6월 2일)에서 다룬 낡고 오래된 미로골목의 풍경과 닮아서였다.
'개조심' 같은 낙서, 담장에 그려진 벽화와 전통문양, 요즘은 잘 쓰지 않는 구식 글자체로 가게 이름을 새긴 간판, 낮은 키에 목이 꾸부정한 가로등, 콘크리트 아파트 전성시대에 이제 더는 축조되지 않는 돌옹벽, 언덕을 따라 삐뚤삐뚤 이어지는 돌계단, 마실 다니는 개와 고양이, 집집마다 정성스럽게 가꾸는 작은 화단, 그 안에 핀 작은 꽃과 배경을 장식하는 푸른 덩굴, 그리고 틈새의 이끼까지.
10대, 20대, 30대 등 젊은 층이 대부분인 인스타그램 사용자들은 세련된 일상을 SNS에 즐겨 담는다. 하지만 그들이 SNS에 업로드한 골목길의 모습은 도심 속 번화가와 비교하면 세련됐다기보다는 투박하고 또 촌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 골목길 사진에 달린 설명이나 댓글들은 딴판이었다. '느낌 있다' '예쁘다' '색감이 참 좋다' '한 폭의 그림 같다' '따뜻하다' '정겹다' 등 모두 젊은이들이 SNS에서 일상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인정'과 '지지'의 의미를 담아 보낼 때 쓰는 표현들이다. 화려한 조명이 비치는, 흡사 패션쇼 스테이지 같은 번화가를 즐겨 걷는 젊은 세대에게 골목길은, 일상을 또 다른 감흥으로 충전시켜주는 발전소가 아닐까.
(골목길 출구)
이쯤에서 미로골목에 조금 거창한 의미도 부여해본다. 프랑스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는 미로(迷路, maze, labyrinth)를 이렇게 해석한다. "미로는 유목민들이 정주민들에게 전해준 마지막 메시지이다. 언젠가 다시 유목민으로 살아야 할 정주민들이 미래에 필요로 할 지혜를 숨겨뒀다." 미로는 이집트에서는 영혼이 가는 길을, 기독교가 도래한 이후의 유럽에서는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아메리카 문화권에서는 자기를 찾는 내적 여행의 길을 의미해왔다. 정주해 살며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짓고 공장 컨베이어벨트에서 자동차며 텔레비전을 조립하던 인류는 이제 '디지털 노마드'라는 이름을 달고, 또 '힐링'을 위해 떠돌며, '인문학'의 세계를 여행하는 등 다시 유목민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 밖에도 미로에 대한 인문'예술적 해석은 동서고금 따질 것 없이 참 많지만, 조금 거창한 의미 부여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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