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 단락 인문학] 심청이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길 바라며

"아내 죽고 자식 잃고 내 살아서 무엇하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자. 눈을 팔아 너를 살 터인데 너를 팔아 눈을 뜬들 무엇을 보려고 눈을 뜨리? 어떤 놈의 팔자길래 사궁지수 된단 말이냐? 네 이놈 상놈들아! 장사도 좋지마는 사람 사다 제사하는 데 어디서 보았느냐? 하느님의 어지심과 귀신의 밝은 마음 앙화가 없겠느냐? 눈먼 놈의 무남독녀 철모르는 어린아이 나 모르게 유인하여 값을 주고 산단 말이냐? 돈도 싫고 쌀도 싫다."-중략-

심청이 아버지를 붙들고 울며 위로하기를, "아버지 할 수 없어요. 저는 이미 죽지마는 아버지는 눈을 떠서 밝은 세상 보시고, 착한 사람 구하셔서 아들 낳고 딸을 낳아 후사나 전하고, 못난 딸자식은 생각지 마시고 오래오래 평안히 계십시오. 이도 또한 천명이니 후회한들 어찌하겠어요?"(심청전 중에서)

심청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요? 우리의 삶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요,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 가능한 걸까요?

심청의 태도는 효도일까, 아닐까를 토론하는 것이 조금 식상해져서 다른 논제를 가지고 와보았습니다. 그 외에도 후보로 '진실은 항상 정의로운가' 같은, 거짓말이 좋을 때도 있는지 생각해보기도 있었는데요. 보나마나 착한 거짓말도 필요하다는 쪽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것 같아서 탈락시켰습니다.

그럼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를 잠깐 살펴볼까요? 스토아학파는 자연법칙에 의해 모든 삶이 섭리대로 흘러간다는 입장입니다. '자연에 순종하며 산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일을 선악과는 무관한 것으로 무시하거나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려 합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대부분 자연의 인도를 따르지만 선택을 하기도 한다고 봅니다. 그 선택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방향으로 선택한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쾌락주의자들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흥청망청 현재 즐겁고 말자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쾌락을 주장하여, 오히려 일시적인 쾌락은 나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사상은 후에 사회 계약설로 이어지죠.

그렇다면 심청의 삶의 태도는 스토아학파의 입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럼 에피쿠로스학파의 논조로 심청의 태도를 비판해볼까요? 한부모가정에 장애인 아버지와 살고 있는 15세 청소년 심청에게는 죽음이라는 운명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나에게 좋은 것을 선택한다면 죽음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해야겠죠? 심청은 한부모가정에 대한 지원과 장애인 복지의 중요성을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심청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요?

스웨덴에서는 16세 이하의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는 자녀 수당이 지급되고, 스스로 몸을 지탱하기 힘든 노인이나 병든 노인을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가사 도우미를 보내 시중을 들어주는 한편 세탁, 밥 짓기, 청소, 시장 보기를 무료 또는 적은 비용으로 해준다고 하는데요. 이것을 심청에게 슬쩍 알려줘도 좋겠네요. 하긴 의료보험제도만 잘 되어 있어도 공양미 삼백 석 대신 적은 비용으로 심학규 씨가 눈을 뜰 수도 있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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