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자식 간에 흉기를 들이대고 사제지간에 주먹이 오가는 세상이 됐다. 부부 사이를 이어준다는 '믿음'은 이제 경전에서만 볼 수 있는 자구(字句)가 되었다.
자살률 1위(OECD 국가 중), 행복지수 꼴찌,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이혼율….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각종 불명예 지표도 공동체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매듭이 잘못된 걸까. 누구는 급격한 산업화, 핵가족화가 원인이라고 하고 누구는 사회 원로의 실종과 밥상머리 교육의 부재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돛을 잃어버린 배처럼 표류하는 사회 한편에서 조용히 인간의 근본을 외치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다시 세워 사회를 올바로 세우자는 주장을 펴는 곳이 있다.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들이다.
초스피드 시대 고리타분한 유교 경전으로 지금 사회 위기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회의적인 시각이 있는가 하면 인류 인문정신의 보고이자 인성교육의 산실인 유교야말로 가정의 위기를 바로 세울 기본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유교와 유림은 현재 가정의 위기에 어떤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까. '가정의 달' 행사로 분주한 대구향교 김필규 전교(典校)를 만나봤다.
◆동서양에서 유교가 시대정신으로 주목=얼마 전 미국 하버드대에서 최고 인기 강의로 마이클 푸엣(Michael Puett'49) 교수의 '고전, 중국 윤리'정치사상'이 꼽혔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중화제국 몰락의 원흉으로 몰려 '타도'되었던 유교가 한 세기 만에 중국 미래를 이끌어갈 새 아이콘으로 부활했다. 유교가 경쟁과 협동을 조율하고 이익과 인의(仁義)를 조화롭게 이끌며 중국 자본주의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에서다.
국내에서도 전국 22개 대학에 '공자학원'이 생길 정도로 공자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다.
동서양에서 유교가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관심을 끌게 된 이유를 김 전교는 이렇게 분석했다.
"산업화 세기를 이끌었던 서구의 과학 물질문명이 한계에 이르고 전 세계가 종교분쟁으로 혼란에 휩싸이며 세계 문명의 중심축이 유교 문명으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도 현재의 교육, 정책, 사상체계로는 사회 현상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의식이 확산되면서 유교가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최근 '밥상머리 교육'의 중요성 강조, 경북도가 최근 시행해 온 '할매할배의 날' 지정 같은 현상이 이 같은 분위기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대구향교를 '열린 공간'으로 이끌어야죠=1995년 대구시의원 시절부터 향교 장의(掌議)활동을 시작한 김 전교는 세 번의 수석 장의를 거쳐 2014년 전교로 추대됐다.
취임 후 제일 먼저 팔을 걷어붙인 분야는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었다. "향교 하면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분위기가 연상되는데 이런 분위기부터 바꿔 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취임 한 달 만에 수석 장의 6명 중 4명, 상무 장의 24명 중 10명을 바꾸는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2년 동안 김 전교는 교육환경 개선을 통해 향교를 시민 품으로 돌려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향교를 역사, 문화의 놀이터로 개방해 지방 문화의 거점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에서였다.
춘'추계 석전대제를 시민과 함께하는 행사로 계획하고 매년 한시 백일장을 열었다. 11개 코스의 교양, 한문강좌엔 월평균 800여 명의 수강생이 몰려들고 있다.
"이외에 전통 혼례식장을 무료로 대여하고 기로연(耆老宴), 성년식 같은 친(親)시민 행사를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습니다. 청소년 인성교육, 체험교실, 예절반, 인문학 강좌도 역점을 두고 있는 코스입니다. 아직 조선시대의 폐쇄적인 공간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향교를 현대의 문화공간으로 활짝 열어갈 계획입니다."
◆무너진 가족'가정 해체…반성 움직임=작년 TV극 '응답하라 1988'이 방송되면서 드라마가 우리 사회에 던져 준 메시지가 있다. 바로 '가족의 의미'였다. 드라마를 통해 기성세대들은 불과 30년 전 자신들이 겪었던 가족 문화와 그 안에 꿈틀거리던 휴머니즘에 열광했다. 그러나 시청자들이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을 때 사회에 펼쳐진 세태는 기성세대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모든 통계들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부모 살해, 폭행 사건은 모두 6천여 건. 2005년부터 10년간 존속살해 사건만 544건에 이른다. 교육 현장도 심각하다. 지난 5년간 교육부에 보고된 교권 침해 사례는 2만4천여 건에 달하고 작년 한 해만 '매 맞는 선생님'들의 호소가 488건이나 이어졌다.
부부 사이에 불륜으로 인한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변심한 상대방이 언제 복수의 활극을 펼칠지 몰라 연애도 맘 놓고 못 하는 세상이 됐다.
김 전교는 "가족의 해체, 배금주의, 생명 경시 풍조가 반인륜적 사회 범죄로 확산되고 있다"며 "이런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에 대해 집단적 자성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회 병폐 바로잡을 대안으로 유교 주목=한때 유학은 우리 역사에서 사대주의, 탁상공론을 일삼고 당파를 만들어 국가 발전을 가로막았던 병폐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 가정의 와해, 사회적 병리 현상이 나타나면서 이 폐단을 바로잡을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사서삼경 강의가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대구향교만 해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강좌에 매월 800여 명의 수강생이 몰려 들고 있습니다. 이제 시민들이 유교의 선비정신, 인성, 가정교육 콘텐츠에 주목하기 시작한 거죠."
21세기 동아시아 중심시대에 이제 유교는 인류 문화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국제적 종교 갈등, 승자독식의 신자본주의 게임 룰, 개인의 파편화 등이 시정되지 않는 한 지금의 사회적 병리현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모순이 깊어갈수록 대체 사상의 출현에 대한 사회적 기대도 깊어지고 있다. 이제 유림들이 이 사회에 목소리를 높일 시기인 듯도 하다.
"앞으로 성균관, 향교, 서원, 유림을 중심으로 도덕 재무장, 조손(祖孫) 격대(隔代) 교육, 밥상머리 교육 등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열어갈 생각입니다. 강상(綱常)의 윤리가 자꾸 가라앉고 있는데 유림이라도 나서 키잡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필규 전교의 재미있는 이력
잔뜩 풀 먹인 도포, 근엄한 탕건, 갓에 휘날리는 도포 자락. 보통 향교의 전교 하면 근엄한 선비의 모습을 떠올린다.
막상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김 전교는 그냥 소탈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가부장 질서가 엄한 가정에서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무척 변화무쌍한 인생 궤적을 그려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 전교로부터 지나온 삶의 이력을 들어 보았다.
-군 생활에 우여곡절이 많았다던데.
▶청년 시절 이런저런 사연으로 뒤늦게 군대에 가게 되었다. 첫 배치는 서부전선 최전방이었고 얼마 후 논산으로 배치돼 훈련소 조교를 1년 정도 했다. 다시 김해 공병학교에 전출돼 거기서 제대를 했다. 3년 동안 최전방, 훈련소, 후방 공병학교까지 두루 돈 셈인데 이런 사례는 많지 않다고 들었다.
-면장, 동장을 무려 10번이나 했다고 들었다.
▶군 제대 후 1963년 하빈면 면서기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내 별명이 '권총알' '독일 병정'이었다. 매년 군내 업무평가에서 1, 2위를 도맡아 했다. 그 덕분에 승진이 빨라 1980년에 성서면장에 올랐다. 그 후 달성군, 달서구 지역이 여러 차례 행정개편되면서 성서읍장, 성서2'3'4동장, 출장소장 등을 역임했다. 32년 재임기간 동안 모두 10개의 읍면동장을 거쳤다. 이 또한 흔치 않은 기록이다.
-대구시의원에 당선된 적이 있다고?
▶성서3동장을 마지막으로 1995년 정년퇴임을 했다. 공직시절 대통령상, 장관상, 각종 공로'감사패 등 많은 상을 받았고 주위의 평판도 좋은 편이었다. 15년간 읍'면'동장을 하는 동안 큰 실수가 없었던 덕에 2대 대구시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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