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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풍] 제왕적 국회상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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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식 대통령제를 두고 흔히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한다. 일부 야당이나,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통령을 탓하고 싶을 때 쓰는 말이다. 언론 역시 이를 인용하곤 하지만 우리나라에 더 이상 제왕적 대통령이 없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제왕적 대통령'이란 1973년 미국의 역사학자 슐레진저가 쓴 책 제목에서 나온 말이다. 월남전을 치르며 전쟁 수행을 이유로 제왕 같은 권력을 휘둘렀던 존슨과 닉슨 두 대통령을 빗대 슐레진저는 제왕적 대통령이라 칭했다. 닉슨은 전시는 물론 평시에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려다 1972년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으로 좌절한 인물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제왕 같은 권력을 그릇되게 사용한 극단적 단면이었다.

비록 제왕적 대통령은 없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여전히 가장 힘이 센 자리인 것은 분명하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가 대략 2천 개쯤 된다 하니 인사권만 가지고도 누구도 넘볼 수 없다. 힘센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다름 아닌 의회 덕분이다. 대통령은 늘 의회의 견제 아래 놓여 있다. 법안 채택을 위해 대통령은 다양할 뿐 아니라 때론 적대적이기까지 한 의회와 타협해야 한다. 적대적 의회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세운 입법 목표를 이룰 수 없다. 그냥 국회를 향해 입법을 요구하던 걸로 끝나던 시절이 아니다. 대통령과 산업계의 끈질긴 요구에도 끝까지 노동법 서비스산업발전법 등 민생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은 19대 국회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거부권을 행사해 입법을 막기도 하는 것이 대통령의 역할이다. 대통령제 원조국가인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만 하더라도 2009년 취임 후 9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국회가 입법권 행사 여부로 대통령을 견제한다면 대통령은 거부권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입법을 견제한다. 대통령과 의회가 입법권과 거부권으로 절묘한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셈이다.

지난 19대 국회 마지막 회기서 국회가 기습 통과시킨 '상시 청문회법'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두고 청와대와 국회가 20대 국회로 넘어와서도 날 선 대립을 이어가고 있다. '상시 청문회법'은 행정'입법'사법부가 이룬 균형추를 명백히 입법부 쪽으로 돌리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국회 권력은 이미 따로 통제할 기관이 없을 정도로 덩치를 키웠다. 헌법에 근거한 국정감사'국정조사는 물론 국회법에 따라 중요 안건의 심사를 위한 청문회까지 도입'운영하고 있다. 국정감사에 국정조사, 청문회제도까지 운영하는 선진국은 찾기 어렵다. 국회는 이미 행정기관이나 사법기관의 장을 불러내 호통치는 것으로 힘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보여줬다. 유력한 입법부 견제 수단이어야 할 사법부의 내로라하는 간부들조차 국회를 기웃거리고, 실제 진출하고 있다. 여기에다 '상시 청문회'까지 추가하면 명실상부 '제왕적 국회'가 탄생하는 것이다.

국회는 이미 공직 부패를 척결한다고 소위 김영란법을 만들면서 정작 국회의원은 예외 조항을 둬 부정 청탁 적용대상에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 '상시 청문회법'을 만들면서는 국민권익위원회에 대해 어떤 민원이든 국회가 요구하면 3개월 이내에 조사해 국회에 보고토록 했다. 독립적으로 움직여야 할 국민권익위를 국회 종속기관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20대 국회 벽두부터 대통령의 거부권을 탓할 때가 아니다. 국회는 미국식 '상시 청문회'제를 도입하기 위해 국정감사를 대신 내려놓든지, 아니면 국정감사 같은 기존 제도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운영하든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국회의원이 이미 가진 권력도 하는 일에 비해 많다고 생각하는데 내려놓기는커녕 더 갖겠다며 국회를 헛돌게 해서는 국회의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지 않는다. 요즘이면 제왕적 대통령보다 제왕적 국회가 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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