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목욕탕과 결별한 이유

목욕탕을 사랑했다. 술자리가 잦아서다. 땀으로 고랑을 이룬 몸을 냉탕에 풍덩 빠뜨리면 숙취가 달아난다. 다시 뛸 에너지도 샘솟는다. 은근히 저녁에 있을 술자리까지 기다려진다. 그래서 냉탕, 온탕을 오가는 길은 항상 사모하는 마음처럼 설렌다.

하지만 전투력의 원천인 목욕탕을 언젠가부터 딱 끊었다.

그곳 냉탕물이 유독 푸르렀기 때문이다. 망루 같은 다이빙대에 올라서면 세월호의 그 바다가 눈에 어른거린다. 4월의 바다도 이처럼 차가웠으리라.

세월호 희생자 304명 중 250명의 아이들은 펴 보지도 못하고 어여쁜 꽃봉오리를 접어야 했다. 기성세대들은 어떤 변명을 늘어놓은들 궤변 수준에도 못 미친다.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빚이요 부채다.

한 지인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진 마음의 빚이 있어 표를 줬다고 했다. 부모 모두를 흉탄에 잃은 영애였다. 과반이 넘는 대선 득표에는 부모로서 여자로서 아들딸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반영됐다는 게 지인의 주장이다. 측은지심의 부채는 향수가 됐고 표로 일어섰다.

대구경북(TK)에선 더했다. 서문시장이 박 대통령의 정치적 성지가 된 것도 이런 마음의 빚과 무관치 않다. 서문시장은 언제나 대통령을 자식처럼 품었다. 그도 서문시장을 어머니 품처럼 여겼다. 힘들 때면 시장을 찾았고 에너지를 얻었다.

하지만 만기가 없을 것만 같던 부채는 자동 상환됐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낳은 유물은 박 대통령에게 진 빚을 상당 부분 갚고도 남았다. 오히려 세월호 7시간이란 역마진이 생겨났다. 이 시간 동안 박 대통령과 관련한 의혹은 민망할 정도로 터져 나오고 있다. 밀애, 성형 시술, 굿판 등 입에 담기도 힘든 말들이 나돌고 있다. 대통령은 지난 1일 신년을 맞아 직무정지 23일 만에 기자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세월호 7시간과 관련한 각종 설에 대해 조목조목 부인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당시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날 정상적으로 계속 보고를 받으면서 체크하고 있었다"며 "대통령 입장에서 '필요하면 특공대도 보내고, 모든 것을 다 동원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조하라'고 하면서 하루 종일 보냈다"고 밝혔다.

대통령의 해명에도 성난 민심은 잦아들지 않았다. 새해에도 어김없이 청와대 앞 촛불은 이글거릴 태세다. 대통령의 말대로 정말 구명에 최선을 다했는지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고에 왜 통영함은 출동하지 못했는지 특검이 불러다 낱낱이 밝혀야 한다. 그것만이 세월호로 숨진 아이들에 대한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길이다.

교수신문은 2016년 병신년 사자성어로 '군주민수'(君舟民水)를 선정했다. 출전은 '荀子(순자) 王制(왕제)' 편인데 원문은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다.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분노한 민심이 촛불을 들고 대통령 탄핵안까지 가결된 상황을 빗댔다. 4년 전 국민이 박근혜호를 물에 띄웠다면 이제 이 배를 가라앉히려 하고 있다. 지난해 마지막 촛불집회 땐 송구영신 대신 송박영신(대통령을 보내자)까지 나왔다. 어쨌거나 정권 초기부터 끊임없이 제기돼 왔던 소통의 부재가 낳은 결과다. 최순실 책임만이 아니다. 소귀(우이독경)를 가진 박 대통령의 과도 크다. 군주민수로 쓰고 공주민수로 읽는 까닭이다.

벌써 해가 바뀐 지도 여러 날이 지났다. 새벽의 고요함의 찢는 힘찬 닭울음처럼 정유년 새해에는 일방통행으로 밀어붙였던 구시대적인 통치 행태부터, 까도 까도 새롭게 확인되는 비선 실세의 농단을 묵은해와 함께 반드시 떠나보내야 한다. 세월호 아이들에게 진 빚을 더 나은 대한민국, 선진 한국으로 갚아 나가야 한다.

시리도록 푸른 냉탕물이 미안해 목욕탕을 끊었듯, 새해엔 술도 금해야겠다. 더 이상 목욕탕을 사랑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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