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조선 사람의 내면을 읽다/설흔 지음/위즈덤하우스 펴냄
간택(揀擇)의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연산군의 폭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수대비로 더 잘 알려진 소혜왕후 한씨(성종의 어머니이자 연산군의 할머니)는 '내훈'(內訓)에 의지해 새 며느리를 들였다. '내훈'은 소혜왕후 한씨가 중국의 '열녀전', '소학', '여교'(女敎), '명감'(明鑑) 등 네 책에서 부녀자들의 훈육에 요긴한 대목을 뽑아서 만들었다. 한씨는 아내, 자식, 어머니로서 여성, 특히 왕실 여성의 행실과 경계사항을 담은 이 지침서를 며느리 간택에 두고두고 참고했다.
역사에 '만약에'라는 가정은 없다지만, '내훈'이 완벽했다면 조선의 역사가 바뀔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빈틈없는 매뉴얼에 따랐다면 인수대비가 폐비 윤씨를 성종의 계비로 들이지 않았을 것이고, 윤씨가 성종의 후궁이 되는 일도, 나아가 폐서인이 되거나 사사(賜死)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연산군 시대의 역사를 다시 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들여다볼 방법은 없다. 그들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떤 책을 남겼는지 기록의 발자취를 따라 생각과 상황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이 다른 책과 다른 점은 조선시대 인물의 내면을 살펴보기 위해 그들이 읽은 책을 화자로 등장시킨다는 점이다. 책에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 역사 문맹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책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저자는 1부 '책이 읽은 사람의 내면'과 2부 '사람이 읽은 책의 내면'으로 구분해 정암 조광조의 '근사록'(近思錄)부터 중인 신분 시인 이언진의 '호동거실'에 이르기까지 모두 24권의 책을 소개하면서 매월당 김시습, 고산자 김정호, 담헌 홍대용, 백사 이항복 등 23명의 삶을 조명한다.
1부에서 저자는 각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그들이 쓴, 혹은 읽었던 책을 화자로 등장시키는 의인화 기법을 쓴다. 인물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상징적인 순간을 골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자료와 사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저자의 상상이 가미됐다. 소설 같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물이 놓인 역사적 상황에 함께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서재 한쪽 책장에 꽂힌 책이 된 듯도 싶다. 예컨대, 임금에게 사약을 받은 조광조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주자학의 교과서 격인 '근사록'과 함께했다. 사사의 명을 받은 조광조가 근사록을 집어 들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장면은 소격서를 폐지하자는 그의 진언이 중종과의 관계를 어떻게 벌려 놨는지와 연결된다. 근사록을 바탕으로 한 신념을 임금에게 강요했던 조광조의 삶을 통해 그가 꿈꾼 성리학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엿볼 수 있다.
'표해록'(漂海錄) 저자 최부는 도루묵 진상의 폐해에 대해 연산군에게 직언했다가 참형을 당했다. 표해록은 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간 최부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으로 중국 저장성 등을 표류하다 중국 각지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담아 펴낸 책이다. 이야기는 갑자사화(1504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자인 표해록은 최부가 16년 전 표류 때 죽었고, 새로 얻은 삶을 소모하고자 꼿꼿한 삶을 택했다고 말한다.
2부는 주로 책의 저자가 책을 통해 본 세상과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담았다. 책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1부와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동여지도가 있기까지 네 차례의 수정을 거친 청구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저자는 네 가지 형태의 '청구도'를 남긴 김정호의 기록을 통해 지도의 변화와 편집 과정을 보여준다. '완벽한 지도'에 가려진 '밑그림'의 재발견이다.
저자는 이점돌과 이언진 등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인물에도 주목했다. 이점돌은 김옥균의 하인이다. 그는 갑신정변(1884년) 때 민가에 불을 지르는 등 개화파를 돕다가 붙잡혀 생을 마감했다. '상놈' 이점돌의 흔적을 되짚을 수 있었던 건 의금부 죄인 심문 기록인 '추안급국안'을 통해서다. 역관 가문 출신 이언진은 골목길을 자신의 왕국으로 삼은 시인이었다. 사후 출간된 '우상잉복'과 '호동거실'에서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24권의 시선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구성됐다. 각 장의 분량이 5장 안팎으로, 출퇴근길이나 화장실에서 읽기에 부담이 없다. 240쪽, 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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