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신철규의 '눈물의 중력'

어떤 눈물은 너무 무겁다 – 신철규의 '눈물의 중력'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너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신철규 '눈물의 중력' 부분)

퇴근길은 언제나 서쪽이다. 금호강 강변을 오른편 옆에 끼고 달려가는 퇴근길은 제법 고즈넉하고 정겹다. 해질 무렵에 은은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경과 더불어 서편 산 너머로 넘어가는 석양빛은 지치도록 서럽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들이 만드는 풍경은 쓸쓸하지만 분명 아름답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섭리다. 하지만 사라진다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틈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 자체를 슬퍼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닌 외부의 강제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고통스러운 부재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차를 몰고 가다가 차를 세우고 운 적이 몇 번 있다. 아래로부터 차오르는 무언가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결국 눈앞이 깜깜해져 버린 경우 말이다. 2014년 4월 16일 퇴근길의 기억은 그래서 여전히 아프다. 하루 종일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생중계를 보면서 가슴을 치다가 퇴근길에 석양을 보면서 왈칵 울음이 터졌다. 어른이라는 사실이, 그것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현재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왈칵 울음이 터지는 것만이 내 유일한 행위라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내 모습이 슬펐다. 마음대로 추모할 권리조차 사라진 나라, 국민의 의무와 인간의 의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 바로 팽목으로 달려가지 못하는 죄스러움, 세월이 세월처럼 다시 올 수만 있다면. 수많은 생각의 고리들이 넘어가는 석양의 빛 속으로 명멸했다. '나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어요.' 내 안의 안티고네가 외치고 있었다. 화면을 스쳐가던 어느 가족은 얼굴을 온통 가리고 엎드려 울고 있었다. 얼마나 눈물이 무거웠을까?

그렇다. 눈물에도 무게의 차이가 있다. 너무나 무거워 엎드려 울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함께 울어주는 것은 힘이 된다. 연대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제 안티고네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안티고네의 출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여전히 진행 중이어야 한다. 반드시 진행 중이어야 한다. 하지만 말이다. 이제는 슬퍼하지 말고, 눈물이 무거워 엎드리지도 말고, 놀면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이야기하면서, 살아가면서, 웃으며 질문하는 안티고네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옆에서 누군가가 또 말한다.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왜 굳이 하느냐고. 안 할 수 없으니까. 안 하면 죽을 것 같으니까. 그게 나의 유일한 추모의 방식이니까.

덧붙임: 신철규는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젊은 시인이다. 곧 첫 시집이 나온다고 한다. 꼭 사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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