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이은정
거울을 보는 행위란 자기 자신을 궁금하게 여기는 본능으로부터 시작된다. 거울이 웃어서 내가 웃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웃기 때문에 따라 웃는 것처럼. 거울 밖의 나와 그 속의 내가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 시선의 틀 안에 머물도록 해야 한다. 거울이 시선의 틀이 되고, 그 속에 있는 궁금한 나는 거꾸로 하나의 풍경이 되어 내 시선의 대상이 될 것이다.
법정 스님의 유명한 일화가 생각난다. 스님이 멀리 출타할 때마다 조실에 하나뿐인 거울을 바랑에 챙기는 비밀이다. 제자에 의해 밝혀진 얘기로는 거울 뒷면에는 '처음 삭발한 날'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불일암 오두막에 걸려 있는 그 작은 면경(面鏡)을 성북동 길상사에서도 본 기억이 난다. 처음 삭발한 날을 잊지 않고 마음이 해이해질 때마다 신심이 칼날처럼 일어난 초발심 때를 거울삼아 수행 정진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우리말 어원에 거울은 '거꾸로'란 뜻으로 나와 있다. 내가 오른손을 내밀면 거울은 왼손을 내밀고, 왼손을 내밀면 반대로 오른손을 내민다. 항상 같은 쪽밖에 기억을 못 하기 때문에 절대 먼저 손 내미는 법이 없다. 손을 맞잡고 흔드는 악수가 이루어지기 위해 양손을 들이미니 비로소 덥석 손을 부여잡는다.
오랜만에 시간을 내 서점에 갔다. 아쉽게도 찾는 책이 절판됐다. 그냥 나오기가 섭섭해 '어른을 위한 동화' 한 권을 두어 시간 만에 다 읽고 슬그머니 제자리에 놓고 나왔다. 이상하게 동화책을 읽은 여운이 계속 귓전에 윙윙거리며 내 마음을 잡아당겼다.
사업에 실패한 A라는 사람이 자살을 결심하고 깊은 강물에 뛰어든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친구 B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그를 발견하고 순식간에 물에 뛰어들어 구사일생으로 살려 낸다. 그다음 날 B는 친구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간다.
"자네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네." B는 화장실 벽에 걸린 거울 앞으로 그를 데리고 간다. 손으로 거울을 가리키며 "내가 소개시켜 줄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야." "이 사람만이 너를 재기시킬 수 있어." "이 사람에 대해 철저히 알지 못하면 너는 또다시 강물에 뛰어들 수밖에 없어."
벽 쪽으로 바짝 다가선 A는 먼지가 잔뜩 묻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한참 들여다본 그는 이윽고 봇물 터진 듯 펑펑 울기 시작한다. B는 친구의 어깨를 몇 번 다독여주고 이내 병실을 나온다. 한 달 후, B는 우연히 A와 길에서 마주친다. 산뜻하게 변한 모습 때문에 하마터면 그를 못 알아볼 뻔했다는 대목에서 이 동화는 끝난다.
운명이란 자신의 성격이나 가슴속에 있는 생각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자살을 결심한 A라는 사람은 한동안 부정적인 일상에 매몰된 채 살았을 것이다. 잊고 지냈던 자신을 발견하고 거울 속 그 남자와 뜨겁게 화해가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거울은 미래나 과거 시간에 의미를 두기보다 오직 이 시간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허망한 꿈을 꿔 헛된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지금 솔직한 현재진행형인 내 자화상을 비출 뿐이다.
이처럼 거울은 있는 그대로 비춰주지만, 사람 마음은 복잡하고 미묘해 겉과 속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교만해 보여도 속마음은 정이 많고 겸손한 사람이 있다. 반면 화려하고 세련된 겉모습과 달리 속울음을 삼키며 고뇌의 밭고랑을 헤매는 사람도 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게 세상 이치라면 겉모습과 속마음은 우리 몸의 피와 살처럼 서로 돕고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 본다.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천사도 되고 악마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거울은 자신의 외피를 그대로 되비춰 줄 뿐이다. 미워서 등을 돌렸다가 다시 들여다보는 이중적인 잣대를 여과 없이 비추는 반사경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것만큼 모든 사람에게 진실하고 솔직한 게 또 있을까. 세상 모두에게 평등하기 때문에 세상 율법의 축소판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란 말의 숨은 뜻은 웃는 자체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내가 먼저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용기를 뜻한다. 내 안에 일어난 변화가 자신은 물론 상대에게 긍정적인 원동력이 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지 않을까.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이 있듯이….
날마다 거울을 본다. 내가 나를 철저히 알고 싶어서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내 마음을 쉽게 읽을 수가 없다. 멀대 같은 희멀건 여인이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한껏 꾸미고 거울 앞에 서 본다. 이만하면 만족이다 싶어 입꼬리를 살짝 올리니 재깍 핑크빛 미소로 화답한다.
댓글 많은 뉴스
대통령실, 추미애 '대법원장 사퇴 요구'에 "원칙적 공감"
[단독] 국민의힘, '보수의 심장' 대구서 장외투쟁 첫 시작하나
李대통령 지지율 54.5%…'정치 혼란'에 1.5%p 하락
지방 공항 사업 곳곳서 난관…다시 드리운 '탈원전' 그림자까지
정동영 "'탈북민' 명칭변경 검토…어감 나빠 탈북민들도 싫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