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월성동 흑요석 산지, 백두산-중부-영남 잇는 '후기구석기 문화' 입증"

백두산 화산석으로 밝혀지면서 선사인 이동 경로 파악에 도움

깬돌을 간단히 가공해서 쓰던 구석기시대 흑요석의 등장은 선사인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깬돌을 간단히 가공해서 쓰던 구석기시대 흑요석의 등장은 선사인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사사대 맥가이버칼'로 불리는 흑요석이 후기구석기시대에 보급되면서 사냥, 짐승 해체, 가죽 재단, 조리, 무기 가공, 원시 의술(醫術) 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권상열(왼쪽) 대구박물관장과 장용준 학예연구실장이 박물관 수장고에서 흑요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측 하단 작은사진 흑요석 원석. 대구박물관 제공

월성동 흑요석 산지가 백두산으로 확인됐다고?

국립대구박물관의 '월성동 흑요석 분석 결과'(본지 9일 자 2면 보도)는 지역 고고학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2006년 월성동 흑요석 발굴 당시 경북대 지질학과 암석광물학연구실은 '월성동 흑요석은 규슈나 백두산의 흑요석과 성분이나 원소에서 다르다'고 발표를 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월성동 흑요석은 북방계도 남방계도 아닌 출처불명의 미스터리 돌이라는 얘기였다. 제3의 흑요석 산지가 있을 수 있다는 가설까지 제기돼 학계에 의문이 증폭되기도 했다.

대구 흑요석이 북방계냐 남방계냐는 소란 속에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이 돌이 후기구석기를 대표하는 지표유물이라는 점이다. 대구의 역사를 2만 년 전 후기구석기까지 소급시키는 결정적 증거라는 것이다. 연천 전곡리나 공주 석장리가 '선사 도시' 콘셉트로 대대적 관광 홍보를 벌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그 유물의 중요성을 엿볼 만하다.

월성동 흑요석이 백두산 화산석으로 밝혀지면서 또 하나 드는 의문이 있다. 직선거리로만 700㎞가 넘는 백두산 돌이 어떻게 대구까지 오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미국의 고고학자 찰스 레드만은 '문명의 발생'에서 구석기인들의 교역거리가 1천㎞가 넘는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백두산 흑요석의 경우 남쪽 전파 거리가 700㎞라면 반대쪽(연해주)으로도 문화가 이동했을 것이기 때문에 교역망은 1천400㎞가 되는 셈이다.

대구박물관 장용준 학예연구실장은 "지금 경기도, 충북 지역에서 흑요석이 수천 점씩 발견되고 있는데 이곳이 중간 거점으로 작용했고, 점차 한반도 남부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권상열 대구박물관장도 "영남지방은 다른 지방에 비해 구석기 유적이 상대적으로 적은데 이번 조사로 대구가 구석기 문화의 한 부분임이 입증됐다"고 말하고 "앞으로 추가 발굴이 이루어지면 한반도에서 선사인들의 문화 전파,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발표로 대구는 백두산-경기도-중부내륙을 잇는 후기구석기 문화의 한 축이었음이 입증된 셈이다.

백두산에서 출발한 선사인이 경기도를 거쳐 중원(中原)에 거주한 후 한강 수계로 내려와 낙동강, 금호강에 배를 댔다는 기분 좋은 상상, 작은 돌이 대구시민에게 내린 새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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