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앓던 '기관지 확장증'
중풍 가족력에 한의사 길 선택
인터넷 초기, 홈페이지로 상담도
3년 전 봉독 활용법 연구 시작
"소염'진통 외에 다양한 활용 가능"
치유농업모델화사업단 만들어
칠곡군 왜관읍 원재한의원.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동네의원이었다. 그러나 건물 지하에 자리 잡은 비 플러스(Bee Plus) 봉독치유농업모델화사업 연구소로 내려가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벌집 모양의 선반에는 지금까지 개발된 의료용 봉독 제품들이 전시돼 있었고, 봉독 정제실은 다양한 실험장비로 가득했다. 이곳에서는 꿀벌의 벌침에서 나오는 봉독을 정제, 동결 건조해 의료용 앰플로 제작한다.
"요즘 머릿속에 온통 봉독 생각밖에 없다"는 정재우(59) 원재한의원 원장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현재까지 병원에서 번 돈을 여기에 다 밀어 넣고 있어요. 아직 적자지만 곧 수익이 개선되겠죠." 대화 내내 정 원장이 '한의사'라는 사실을 잊었다. 사상체질이나 음양오행 대신, 봉독의 임상 연구 결과와 학술 논문 주제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가 '한의사'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병원 간판을 다시 확인한 뒤였다.
◆병약하고 수줍은 소년…스스로 치료 위해 한의사 선택
정 원장은 "어릴 때부터 몸이 굉장히 약했다"고 했다. 감기는 내내 달고 살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잔병치레를 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를 가장 괴롭혔던 병은 '기관지 확장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목에 뭔가 걸리는 느낌에 뱉어 보니 주먹만 한 핏덩이였다. 다음 날 찾아간 병원에서 그는 기관지 확장증 진단을 받았다. 기관지 확장증은 폐렴 등으로 기관지 벽이 손상돼 영구적으로 늘어난 상태다. 병을 치료하려고 한의학과에 진학했지만, 대학 시절에도 감기에 걸리거나 체력적으로 힘들면 객혈은 어김없이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절감하며 호흡기내과를 전공해 석'박사 학위까지 땄다.
한의사의 길을 선택한 데는 집안 내력도 이유가 됐다. "대대로 집안에 중풍 환자가 많았어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가깝게는 어머니도 고혈압에 뇌출혈로 49세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한의사가 되면 집안에 중풍 환자가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다행히 제가 한의사가 되고 난 후 아직 중풍 환자는 없어요. 아버지는 올해 96세이신데 아직 정정하세요."
1984년 그가 고향인 칠곡에 개원한 것도 건강이 이유였다. 수시로 피를 토하는 상황에서 공기가 나쁜 대도시에서 지낼 자신이 없었다. "제가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다면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드리지 못했을 거예요. 적당히 못난 덕분에 아버지를 곁에서 늘 보살필 수 있었고, 자랑스러운 아들도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좁은 지역에 갇혀 있다는 답답함은 억누를 수 없었다. 그가 선택한 건 공간의 제약이 없는 인터넷이었다.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막 넘어가던 1990년대 초반. 그는 직접 웹에디터 프로그램을 사서 홈페이지를 꾸몄다. 천식과 아토피질환, 알레르기성 비염 등을 전문적으로 상담해 주는 홈페이지였다. "인터넷을 활용하니 서울과 부산 등 전국에서 환자가 찾아왔어요. 한 달에 한 번씩은 서울에 있는 친구 병원을 빌려 상담도 하고 진료를 하기도 했어요."
◆칠곡을 봉독의 세계적인 메카로 키울 것
호흡기질환에 집중하던 그가 봉독에 빠져든 건 3년 전이었다. 양봉특구인 칠곡에서 '봉독'은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분야였다. 관심 있게 들여다보니 봉독의 효능은 놀라웠다. "봉독의 멜리틴 성분은 소염'진통에 탁월한 효과가 있어요. 또 면역 체계를 잡아주고 피를 맑게 해줘요. 피부질환과 자가면역질환, 안과질환, 대사성질환에도 효과가 있어요. 전 세계의 논문 데이터를 수집해 보니까 자료가 엄청난 거예요."
봉독의 효능에 집중한 그는 봉독치유농업모델화사업단을 만들었다. 지역 양봉 농가들이 판로가 없다는 이유로 봉독을 채취하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세보다 비싸게 봉독을 사들여 고도로 정제된 건조 봉독 제품을 생산한다. 지난해 7월부터 4개월간 10여 종의 의약용 제품도 개발해 70여 곳의 한의원에 공급하고 있다. 또한 매달 한 차례 비플러스 봉독 연구회 세미나를 열고 봉침요법의 원리와 각종 질환 적용 가능성, 의료용'미용 제품의 효과 등도 연구하고 있다.
정 원장은 "칠곡이 세계적인 봉독의 메카가 되면 지역 산업 전체가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양봉산업이 활성화되려면 꿀의 재료가 되는 밀원식물이 보급돼야 해요. 밀원식물이 보급되면 아름다운 도시가 될 것이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품질도 높아지겠죠. 봉독의 효과가 지역 산업 전체로 확대될 수 있는 겁니다."
밀원식물 확대에는 그가 20여 년 전부터 즐겨온 식물 사진 촬영이 밑바탕이 됐다. '산들꽃사우회'라는 식물사진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회원들과 함께 '한국특산식물'(2007년), '보현산의 풀과 나무'(2012년), '청송 자생약초도감'(2015년) 등을 펴냈다. 그는 지난해 경북대학교와 함께 칠곡의 밀원식물 보급을 위한 식생 조사도 진행했다. 아까시나무를 비롯해 금오동촌의 때죽나무 군락지, 칠곡보 인근 관호산성의 찔레꽃 군락지, 팔공산 금화계곡의 층층나무와 곳곳에 자생하는 귀룽나무 군락지를 활용하는 방안도 냈다.
"오는 9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세계양봉대회에 통풍 개선과 간질환 개선 등을 주제로 논문을 낼 계획입니다. 올 연말까지는 봉독요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봉독요법학'을 펴고요. 최종적으로는 칠곡에 봉독을 기반으로 한 양한방 난치병연구치료센터를 설립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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