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차재원의 새論 새評] 공직의 자격

부산대 졸업. 영국 엑시터 대학 국제학 석사. 전 국제신문 서울정치부장. 정의화 국회부의장 비서실장.
부산대 졸업. 영국 엑시터 대학 국제학 석사. 전 국제신문 서울정치부장. 정의화 국회부의장 비서실장.

'법꾸라지' 3인방 처신 목불인견

공직자로서 명예 내버린 지 오래

권력자에 당당히 따지진 못해도

직무수행 잘못 부끄러워는 해야

2014년 6월 13일 그는 러시아 출장 중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국관광주간 행사 참석 업무였다. 이날 행사장에 주러시아 한국 대사관으로부터 전문이 한 통 날아들었다. '국무위원 면직 통보'. 현직 장관의 해외 공무 출장 중 경질,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후임 내정도 없는 사직 통보였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 아니면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

최근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와중에 진실이 밝혀졌다. 괘씸죄 또는 불경죄였다. 출장 며칠 전 그는 박근혜 대통령을 면담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주도하고 있는 문화계의 색깔 입히기와 핍박 조치는 문제가 많습니다. 중단시켜야 합니다."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반대 뜻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주무 장관의 반발에 대통령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미운털은 진작부터 박혔는지 모른다. 그해 세월호 참사 직후 열린 국무회의. 대통령은 해양경찰의 해체를 전격 선언했다. 그가 한마디 했다. "정부 조직을 바꾸는 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국무위원들과 한 번 상의도 안 하고 혼자 결정을 하십니까." 대통령은 진노했다. "그러면 내가 대한민국 모든 사람의 얘기를 다 들으라는 겁니까."

싸늘히 얼어붙어 버린 회의장엔 그의 서울고 동기도 있었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그 역시 다음 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여름쯤 터진 메르스 사태에 대한 문책 인사였다. 그러나 4개월 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으로 재기했다.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유 또한 얼마 전 그가 특검 수사 1호로 구속되면서 밝혀졌다. 혐의는 장관 사임 직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때의 불법행위. 국민연금공단에 무조건 찬성토록 압박했다는 것이었다. 국내 최고 연금 전문가로 꼽혔던 그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청와대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당시 갈등하던 그에게 대통령은 '걱정 말라'는 암시를 줬다고 한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직함까지 언급하면서.

고교 동기 두 사람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누가 옳았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하지만 현실은 당위로만 흘러가진 않는다. 다수 공직자는 문형표의 선택을 따랐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대표적 사례. 대통령 지시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재벌 팔을 비틀어 돈을 거뒀다. 총수 사면 건도 거래 대상으로 삼았다. 납품, 인사 청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도 뭔가 꺼림칙했던 모양이다. "대통령 뒤에 비선 실세가 있는 것 아니냐." 정호성 부속비서관은 "그런 것 없다"고 일축했다. 이를 위안 삼았던 것일까. 끝내 양심의 아우성을 외면해버렸다.

"그래도 잘못을 인정한 문형표와 안종범은 좀 봐줄 만하다." 요즘 특검 안팎에서 나도는 말이다. 이른바 '법꾸라지'와 너무 대비되기 때문이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 우병우 전 민정수석, 조윤선 문화부 장관. 법률 지식을 활용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3인방의 처신은 정말 목불인견(目不忍見). 그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잘못을 했다, 안 했다'가 아니다. "나는 몰랐다"는 주장이다. 최순실의 존재도, 대통령의 일탈도, 블랙리스트도 모른다는 것이다. 당연히 아무런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게 결론이다. 한마디로 '무능한 바보'를 자처하고 있다. 전문가로서의 자존심도, 공직자로서의 명예도 내버린 지 오래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 법률 엘리트로 불렸던 이들의 생생한 민낯이다.

공직은 꽃길이 아니다. 권력은 종종 불의와의 타협을 유혹한다. 심지어 굴종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모두가 유진룡처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수오지심(羞惡之心'내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은 갖고 임해야 한다. 권력자에게 대놓고 당당하게 따지진 못해도, 부당한 지시는 거부하는 배짱. 공익을 좀 먹는 부정과 불법에 혼자 맞서지 못하더라도, 고발하는 용기. 법꾸라지에 전문지식이 달려도, 공직자의 소명감으로 꾸짖을 수 있는 패기. 이럴 자신이 없다면 아예 공직을 넘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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