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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호가 만난 사람] 김황식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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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대통령 덕목은 만델라 같이 반대파도 포용해야"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만날 때는 잘 몰랐는데, 헤어지고 보니 진가(眞價)가 느껴지는 그런 사람. 그리워지는 '그때 그 사람' 중에는 연인만이 아니라 지도자도 있다. 2년 5개월 재직기간 동안 조용하면서도 소신 있는 국정운영으로 명재상이란 평가를 받았던 김황식 전 총리를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40여 년 공직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강의, 칼럼 집필 등을 통해 오랜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후학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2011년 11월 대학생들과의 간담회에서 "존재감이 없는 게 내가 목표하는 바다. 컬러가 없는 게 내 컬러다. 나는 이슬비 같은 총리가 되겠다"고 했다. 그렇게 말씀하신 배경과 동기는?

▶총리가 되면서 어떻게 일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봤다. 존재감을 중시해 개성과 색깔을 드러내기보다 주어진 일을 차분하게 해 나가자고 마음먹었다. 소나기는 화려하게 내리지만 흙을 쓸어간다. 반면 이슬비는 소리 없이 내리지만 대지에 스며들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다. 당시 기자들이 물으면 웃으면서 "나는 눈 덮인 휴화산"이라고 했다. 안에는 언제 분출할지 모르는 마그마가 끓고 있지만 겉으로는 평온한 그런 모습을 행동의 준거로 삼고 싶었다.

-이슬비 총리 발언 하루 전 대전 현충원에서 열린 연평도 포격 도발 전사자 1주기 추모식에서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물리치고 비석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추념식 시작 무렵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10여 분 뒤 비가 오기 시작했고, 참석자들이 하나둘 우산을 받쳐 들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더라도 엄숙한 의식의 주도자인 나는 그대로 있는 것이 온당하겠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비옷을 갖춰 입고 우산을 쓰는 것 자체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화재진압을 하다 순직한 소방관 빈소에 사전 통보 없이 조문하기도 했다. 총리실 의전팀도 다음 날 신문을 보고 알았다던데… .

▶경기도 송탄소방서 소방관 두 사람이 화재진압 중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상을 가려 하는데 비서실에서 의전기준에 안 맞다고 반대했다. 그런데 다음 날 신문에서 어린 초등학생 상주가 있는 것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수행비서 한 사람과 경호팀 한 사람만 데리고 갔다. 어린 상주를 보고 "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소방관이요"라고 씩씩하게 대답하길래 "소방관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하는 분이다. 네 아버지는 소중한 일을 하시다 돌아가셨다.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2013년 2월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총리 직무수행에 대해 긍정평가 37%, 부정평가 20%로 긍정 24%, 부정 58%였던 이명박 대통령에 비해 양호하다. 이슬비처럼 했더니 효과가 더 좋았다. 의도하신 것인가?

▶그 정도로 영리하지 않다.(웃음) 그런데 국민들의 안목은 정치인들의 사고 수준보다 높다. 금방 꿰뚫어 본다.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두 가지라고 본다. 사람을 잘못 보고 국정에 개입시켜 법치주의를 파괴한 대통령 개인의 잘못과 그런 것을 방지하고 감시할 수 있는 공적 시스템의 미비, 즉 사람의 문제와 제도의 문제가 혼합된 결과다.

-만약에 총리 재직 중 최순실 사건이 발생했다면?

▶대통령께 국가적으로 큰 피해가 가는 일이기 때문에 내일이라도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리는 게 도리다. 한 번 건의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시도해야 한다. 그래도 대통령께서 '하지 마!' '묻어!'라고 하신다면 물러나는 수밖에 없다.

-독일 정치 시스템에 대해 관심도 많고 연구도 많이 하신 것 같다. 독일이 한국 정치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망의 원인을 나치의 권력독점에서 찾았다. 그래서 되도록 권한을 쪼개고 나누어서 그 권한을 다시 합치는 과정에서 국력을 결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다당제 환경에서는 한 정당이 과반 의석이 차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이때 단일공약을 만드는 작업을 해서 수백 페이지짜리 연정협약서를 만들고 장관 자리를 배분한다. 한 정당이 단독 집권해서 정국을 이끌고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정치 안정과 국민 통합에 도움이 된다. 갈등과 대립의 정치가 아니라 협치와 연대의 정치가 제도화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선거제도는 철저히 승자독식이다. 51%가 모든 것을 갖고 49%는 철저히 배제된다. 갈등과 정쟁을 조장하는 제도다.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런데 남북 대치 현실에서 내각제는 맞지 않다는 주장이 많은데… .

▶독일은 의원내각제지만 성공적으로 통일과 경제부흥을 이루었고 유럽연합의 중심국가가 되었다. 내각제라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선입견이다. 그런데 정당의 조직과 운영이 민주적이어야 내각제가 성공할 수 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아직 멀었다. 보스 중심의 파벌정치와 낙하산 공천 풍토 속에서 진정한 내각제는 어렵다. 과도기를 거쳐야 한다.

-마포대교의 별칭이 견자교(犬子橋)다. 장차관들이 국회 답변을 마치고 돌아오다 국회의원들을 향해 혼잣말로 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총리 시절 국회에서 답변하느라 엄청 시달렸을 터인데… .

▶내가 존재감이 없었다고 했는데 그래도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 국회였다.(웃음)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을 비생산적이라 느낄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국민과의 소통이다. 정부 정책을 오해하는 것에 대해 잘 설명을 해 풀어줄 수 있는 소중한 자리다. 의원들이 내가 몰랐던 것을 지적하고 건의할 때는 공부가 되기도 했다. 또 질문하는 사람을 내심 평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광주지법원장 시절 내부통신망에 올린 '지산통신'이라는 글에서 본인의 철학을 중도저파(中道低派)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2004년에 쓴 글인데 지금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사람의 이념성향을 보수-진보, 또는 좌우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한쪽으로 모는 사회적 풍조가 있는데 바람직하지 않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다. 그중에 자유에 좀 더 중점을 두는 것이 보수라면 진보는 평등 쪽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쪽이 우선인가는 시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중도의 중(中)은 단순한 기하학적 중간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상황에 맞는 적중(的中)이 진정한 중도이다.

-적중한다는 것은 정해진 몸체가 없고 때에 따라 있는 것이라는 시중(時中)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저파는 무엇인가?

▶중도가 기하학적 중간점이 아니라면 중도우파냐 중도좌파냐 하는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지산통신'에서 "중도좌파, 중도우파 중 어느 쪽이냐고 동문(東問)한다면, 소외계층을 보듬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도저파(中道低派)라고 서답(西答)"하겠다고 한 것이다.

-최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귀국해서 본인의 이념성향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했는데, 총리 표현대로 중도저파라고 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반반(半半)이라는 비판도 피하면서 새로운 좌표를 제시할 수 있었는데….

▶중도저파는 내가 글에서 처음 쓴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른다. 그래서 반 총장도 사람들이 확실히 알 수 있도록 기존 용어인 보수와 진보를 사용해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취지는 중도저파와 맞닿아 있다.

-총리 재직 시절 페이스북으로 소통을 하셨다.(김 전 총리는 연필로 직접 쓴 편지를 사진 찍어 페이스북에 100회 올렸다) 2012년 9월에 '대선의 계절에 만델라 대통령을 생각합니다'라는 글을 썼는데 조기 대선이 불가피해 보이는 지금, 차기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만델라 대통령은 27년 동안 외딴 섬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당선된 뒤에 정치보복을 하지 않고 흑백이 통합된 남아프리카연방공화국을 만들었다. 편 가르지 않고 반대파까지도 포용해서 통합을 이루었다. 이제 우리에게도 만델라 같은 대통령이 필요하다. 정치를 하다 보면 미운 사람이 제법 생긴다.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대통령이었으면 한다.

-모친에 대한 추억이 각별하시다. 구걸 온 거지에게 손님이라 부르라 엄명하신 분이었다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마루에 앉아 놀고 있는데 문간에서 거지가 들어오기에 "어머니 거지 와요"라고 알려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거지에게 쌀을 한 바가지 주고 안방으로 들어가시다가 내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우리 집에 오는 사람은 다 손님이다. 이제 거지라는 말 쓰지 마라"고 꾸짖으셨다. 어릴 적이지만 무척 놀랐다. 나중에 그 이유를 여쭤보니 "우리 집이 살 만하니 손님이 오는 것이다. 우리 집이 못살고 손님 올 수준이 안 되면 오라 해도 안 온다. 복으로 알아라"고 말씀하시더라. 그런 어머니의 교육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힘의 원천이다. 그 어떤 책보다도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 대목에서 김 전 총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었나 싶다. 총리 재직시절 25만원짜리 맞춤 양복을 해 입으셨다는데 지금 이 옷인가?

▶맞다. 장애인의날 행사를 하는데 어떤 블로그에 중증장애인을 포함해 장애인을 고용해 양복을 만드는 회사가 있다 해서 찾아가 맞췄다. 25만원짜리였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반응이 뜨거웠다. 이명박 대통령도 거기서 맞췄다. 나도 이 옷 말고 4벌을 더 맞췄다.

-마지막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있는 국민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최근 일어난 일에 대해 굉장히 낙담하고들 계신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온갖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해 왔다. 잘못된 상황에서 교훈을 얻어 마음을 다잡고 제도를 개선하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지역이나 이념을 떠나 과연 누가 진정으로 국난을 극복할 지도자인지를 잘 판단해 주셨으면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최근의 혼란과 진통은 우리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될 것이다.

*매일신문 TBC 공동기획 '신지호가 만난 사람'은 21일(토) 오전 9시 30분 TBC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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