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현재 있는 곳은 고개를 들면 천왕봉이 보이는 지리산 마천골, 남편 고향이다. 마을 사람들이 오다가다 우리 집에 들러 달달한 커피와 함께 일상을 이야기한다. 그들에게는 퇴비 냄새, 나무 타는 냄새가 나고 오래도록 온몸에 스며든 갖은 양념 냄새도 난다. 담배와 술 냄새가 나는 이도 있다.
살아온 냄새를 풍기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 인정하게 되고 덤으로 삶의 지혜도 얻는다. 늘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어울려 살아간다.
남편 어릴 적 친구 중에 지적 능력이 약간 떨어지는 이가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에서 전학을 왔다 하여 남편은 이 친구가 엄청나게 똑똑한 줄 알았단다. 그런데 승철(가명)이라는 자기 이름을 철승이라 적는 걸 보고 정체를 파악한 후 많이 놀리고 괴롭히기도 했던가 보다.
중학교 졸업반일 때 선생님이 승철 씨에게 어느 학교로 진학할지 물어보았다. 옆에 있던 남편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승철 씨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여상으로 간다고 그래"라 했더니 정말 그대로 외쳤단다. 남편을 위시해 많은 친구가 승철 씨를 놀렸을 테고 이 친구는 상처를 입고 왕따당했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는 아직 도시와 다르다. 한 지역에서 오래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은 서로 귀중하게 여길 줄 안다. 지역공동체의 정이다. 그는 적당히 자기를 방어할 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마음을 나눌 줄 안다.
아버지 장례식장에 남편 친구들이 찾아왔다. 지리산에서 대구까지 일부러 조문 온 것이다. 그곳은 슬픔과 안타까움, 회한과 죄스러움, 울음과 추억으로 지친 마음이 겨우 버티는 공간이다. 보통 사람들은 장소와 때에 따라 해야 할 행동이나 말을 선별한다. 그곳에서는 낮은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격식에 맞다. 아마 승철 씨도 그런 위로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인은 좋은 곳에 가셨을 것이다. 그러니 힘내서 밥도 먹고 남은 날들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것이 남은 자의 몫이다. 이 상실의 허망함 또한 지나갈 것이다'라고. 남편 친구들이 작별인사를 하고 저만큼 가는데 승철 씨는 돌아서서 잠시 할 말을 찾으려는 듯 머뭇거렸다. 마침내 그는 주먹 쥔 손을 흔들며 장례식장에서 크게 외쳤다. "제수씨! 파이팅."
나도 모르게 같은 모습으로 파이팅을 했던가 안 했던가. 벌써 4년 전 일이다. 아들이 네다섯 살 때 불어준 삑삑거리는 리코더 소리는 흐르던 눈물을 웃음으로 바꾸는 마법의 힘을 가졌고, 승철 씨가 전해준 엉뚱한 파이팅은 지금도 신선한 위로의 힘을 지니고 있다. 상대의 마음이 전달될 때 우리는 위로를 받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서툴고 격식에 맞지 않아도 우리는 알아본다. 무엇이 진심이고 진실인지를.
지금 허탈함과 분노에 피로해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위로라면 승철 씨 버전으로 외쳐본다. 우리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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