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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행복-제2회 매일시니아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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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이태형 화가
삽화 이태형 화가

작은 행복

강정희

또 한 해가 마무리되어 병신년을 맞이했다. 세월에 일그러져 나이를 먹을수록 아쉬운 날들이 더 많아진다. '시작'이라는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릴 것 같은 희망을 품는다.

독일에서는 보통 1월 6일이 지나야 성탄절 장식품을 정리하지만 난 오늘 아침 일찍이 서둘렀다. 모든 것이 타이밍이 있듯이 성탄이 지난 후에는 실감이 나지 않은 마치 김빠진 맥주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작은 성탄 트리에 달린 장식품, 별들이 반짝이는 식탁보, 빨강 징글벨이 그려진 책상보, 착한 천사들의 장식품 등 다음 성탄절을 위하여 빈 통에 차곡차곡 넣어 지하실에 갔다가 두고 새로운 식탁보를 준비했다.

우리 집의 큼직한 둥근 식탁은 내가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이다. 둥근 식탁 위에는 눈뜬 아침 일찍이 베란다 창문보다 컴퓨터 윈도우를 먼저 여는 노트북, 마치 나의 서재에서처럼 읽다가 중단한 책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고 사전과 언제든지 기록을 할 수 있는 두꺼운 공책이 놓여 있다. 따뜻한 녹차를 수시로 마실 수 있는 보온병 옆에는 예쁜 한국 도자기 컵도 놓여 있다. 옆에는 커다란 창문이 전체 벽으로 되어 있어서 보석 같은 햇살이 비추고 있다. 푸른 나무, 가을의 파란 하늘, 풍성하게 구름 꽃을 피워내는 고운 여름의 하늘, 비, 노을빛, 밤하늘의 별, 달님, 하얀 눈으로 덮인 바깥 경치를 보며 나름대로 즐길 수 있는 우리 집 안에서의 명당자리이기도 하다. 이 자리는 그간 꼭꼭 잠겨 있던 내 감성의 빗장을 자연스럽게 풀며 뒤늦게 붙잡은 문학의 향기를 따라 편안한 마음으로 내 생각의 조각들을 정리하고 마음속에 먼 가슴을 열어 주는 창작의 산실 역할을 해준다.

내가 한국에 나가면 가장 즐기는 일이 나 혼자만의 쇼핑이다. 시장에 나간 첫날은 눈으로 쇼핑하며 이것저것을 살핀다. 독일에서는 만날 수 없는 공예품 가게, 그릇 가게, 액세서리 가게에 들르는 날에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꼭 사야 할 목록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 집에 가져다 놓으면 무척 잘 어울릴 것만 같은 생각에 상상력을 펼친다. 그래서 집에 갖다 풀어놓으면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마치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잘 어울린다. 그럴 때면 입이 함박꽃처럼 벌어진다. 지난가을에 한국에 갔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한지로 만든 사슴, 거북이, 오리가 놀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예쁜 육각형 상자와 책상보, 천으로 만든 브로치, 그리고 긴 머리핀이었다. 모두 다 얼이 담겨 있는 사랑스러운 소품이다. 비단을 조각조각 이어서 만든 한국적인 예쁜 색상의 작은 식탁보는 날 황홀하게 만들었다. 하나만 고르기는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쇼핑 행복 알파였다.

꽃자주색 바탕 색깔에 빨강, 분홍, 노랑, 보라, 초록, 파랑, 황금색 네모 조각으로 이어진 작은 식탁보를 배낭에 넣으며 나만의 미소를 머금었다. 색상이 고와서 외국인들은 액자에 넣어 장식품으로 벽에 건다고 한다. 난 오늘 고운 식탁보를 내가 가장 자주 머무는 식탁이면서 남편이 좋아하는 그린 색깔이 나는 둥근 식탁보 위에 올렸다. 둥근 식탁에 맞추어 두꺼운 유리 아래에 비추는 한국적인 식탁보는 어찌나 고운지 좋은 것을 먹는 것보다 내겐 더 영양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 그린 색깔의 큰 둥근 식탁보에 예쁜 한국 식탁보를 펼치고 시 두 편을 읽고 향이 짙은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인순이의 노래 '이토록 아름다웠음을'을 들었다. 마치 한국을 떼어다가 독일에 가져온 느낌이다. 내 영혼도 배부른 행복한 아침이다.

나에게 괴로움도, 번뇌도 없으면 그게 행복이라는 것처럼, 작은 행복감을 느꼈다. 내 삶이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들 때 오늘 하루 무사히 보내 감사하고, 가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가족이 있어서 행복한 것처럼. 우리에게 행복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곳에서 소리 없이 찾아오는 것이지 결코 크고 많은데, 그리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새삼 알았다.

세월의 흐름이 점점 빠르게 느껴지는 세대가 되었다. 시간은 가고 있다. 내게 1시간이 젊은 아이들에게는 10시간이다. 사랑하고 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모난 마음, 구겨진 마음, 송곳 같은 마음들도 다 사랑으로 철이 드는 아름다운 한 해를 엮어 가련다.

내 가슴에 석류 알처럼 예쁜 생각들이 오늘도 내일도 내내 고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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