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하누리와 홍익(弘益)

'총살을 본대로 적어보겠다…먼저 교살죄의 광경을 적는다. 장소는 남문 밖…옛날 진위대의 연병장이었다. 1906년 봄, 2일간 계속해서 60명가량을 교살죄로 처형하였다. 일반 범죄자도 있었지만 주로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를 그들은 화적(火賊)으로 몰아 대량 학살하였다…첫날은 20명, 그 이튿날에는 40명 정도가 교살 되었다. 구경꾼은 한'일인으로 몇백 명이나 되었다…내 친구는 이 광경을 보고 까무러쳤다 한다. 참으로 참혹하였다. 이처럼 많은 사람을 일시에 처형한다는 것은 한국에서도 아주 드문 일이라고 하였다.'(가와이 아사오 지음'손필헌 번역, '대구물어'에서)

옛 대구읍성에는 4개의 주요 출입문이 있었다. 흉적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이 될 만큼 친일 매국 관료로 한 시대를 누린 박중양이 1907년 허물기 전까지는 말이다. 중심 출입문인 남문 역할은 약전골목 옛 자리에서 현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 옆으로 옮긴 영남제일관이 했다. 또 현재 동아쇼핑 뒤쪽에 관덕당이, 중앙파출소 자리에는 남장대 또는 선은루의 누각이 있었다. 지금은 관덕당과 남장대를 합친 관덕정 형태로 적십자병원 뒤 아미산 자락에 남았는데, 부근이 옛 조선군대인 진위대의 연병장이자 처형장이었다.(거리문화시민연대, '대구신택리지'에서)

이 처형장은 무엇보다 우리 역사상 첫 토종 종교로 인간 평등을 외치고 실천한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1864년 참수된 곳이다. 또 여러 차례에 걸친 박해로 천주교인 24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당시 대구에 살던 일본인 가와이 아사오의 기록처럼 나라를 침탈하는 일제에 맞서 의병 활동과 항일 투쟁에 나선 조선 백성이 화적이란 누명을 쓰고 얼마나 많은 목숨을 잃었는지 알 수 없는 역사 터다. 즉 당시 지배 기득권층의 미움으로 박해받은 종교인들과 나라에 목숨을 바치고도 잊힌, 힘없는 조선이란 나라 백성의 아픈 상처와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마침 대구시가 이런 사연이 배어 있고 지금도 불교, 천주교와 기독교, 유학, 다른 신앙 등 다양한 종교단체와 시설 같은 자원이 모인 중구 남산동 일대를 새 명소로 조명하는 '남산 하누리 행복공간'사업을 벌인다고 한다. 그야말로 '우리는 하나'라는 뜻의 순 우리말인 '하누리'에 어울릴 법하다. 이들 뭇 종교는 하나같이 자비, 사랑,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꾀해 국조 단군의 홍익(弘益) 정신과도 같은 맥락이어서다. '하누리'사업은 대구답고 그럴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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