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뼈
방소영
35년 사셨던 아버지 묘
납골당에 모시던 날
물기 없이
옥수수 대궁처럼 잘 삭은 뼈가 보였다
경사진 아버지 묘 자리
수맥자리에 누운 뼈는 새까맣다는데
마음 쓰인 것과 달리
노랗게 맑은 뼈는 두드리면 옹기소리가 난다
생전에 잘 나누던 모습처럼
지나가는 벌레에게 당신 살 내어주고
바람과 습기와도 잘 놀아주고
곰팡이 친구가 되어준 뼈들
회분처럼 곱게 갈린 뼈
옹기 속에서
사르륵 스르륵 몸 뒤척이는 소리
가벼워진 아버지 담은 옹기를
내가 꼭 안고 간다
◇사거리 감정평가서
배종영
반세기를 건너 찾은 사방(四方)은
어릴 적 내가 살았던 소읍의 작은 사거리다.
나는 그럭저럭 인간의 재화(財貨)를 감정하는 직업을 얻었다.
사거리를 감정하기 위해선 우선
각지의 모서리를 달래야 한다.
사라지는 차량의 뒤를 세야 하며
햇볕의 노선도를 살펴야 한다.
각각 계절의 선두이거나 후미로 사라지는
길들의 방향도 살펴야 한다.
사거리의 평가가 애틋한 것은
내가 떠나온 방향과 내가 기다린 방향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거리에서는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것이
바람처럼 둥글다.
다닥다닥 붙은 따개비 같은 집들과 늙어가는 대문들
장독대 옆 앵두나무도 헉헉 숨이 차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한때는 흥청거렸던 반경(半徑)으로
휘어지거나 잠잠해져 간다.
드라이버 끝의 수나사 같은 정착지들
빙글빙글 돌아서 뿌리내린 곳
사거리의 어느 쪽은 내 어머니가 끝까지 바라본
나의 뒷모습이거나 내가 애써 외면한
어머니의 눈빛이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사거리
떠나고 기다리고, 사거리는 지금도 붐비지만
추징불가의 이자율 같은 그리움이다.
◇소의 울음이 저수지처럼 깊어질 때
김숙
봄 말뚝이 싹을 틔운다
볕을 따라 왁자하게 모여든 잎사귀들
말뚝을 감고 한 철을 난다 날마다 몇 장의 풍경을 끌고
저수지로 들어간다 소 울음소리가 멀리 풀렸다가
말뚝에 감긴다
정오가 소의 뿔을 옮겨가고
떠난 시간은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살아있는 것들이 저리 서두르는 것은
돌아오는 길을 해(年)의 기억에 두었기 때문이다
정오가 기우는 방향으로 따라가는 것들이 많아
말뚝은 한사코 뿌리를 내린다
반경에 갇힌 족적
말뚝은 꽁무니 근처를 서성이고
능에들 꽁무니로 모여든다
소는 몇 개의 말뚝을 옮겨 다니며 바깥을 산다
소의 울음이 저수지처럼 깊어지는 때
멀리까지 갔던 울음이 뿔을 기억하고 돌아온다
몇 번이고 곱씹어 생겨난 구름의 잔상들이 검은 통로를 빠져나오고
그 눈 속엔 저수지로 통하는 젖은 길이 보인다
◇적멸
김광숙
삶과 죽음은 경계가 없다
어느 날 그의 생은 느닷없는 허공이 되었다
갓 스물의 농부
넓적한 얼굴 튼튼한 팔로 웃통을 벗고 경운기를 몰았다
나는 고봉밥 푸른 고추 뚝 잘라 새참을 만들고
그를 알아 가고 봄이 오고
과수원 배꽃이 하얗게 피었다
꽃은 피면서 진통을 시작했다
그의 생 위로 떨어진 때 이른 배꽃
지는 꽃은 속삭이지 않았다
난산한 열매는 쓸모가 없었다
그와 나 하루를 함께 다녔다
'가을비 우산 속에' 영화를 보고 그가 울고
비 내리는 문화동 거리를 함께 걸었다
소리사에서 흐르던 이별 노래
깜깜한 하늘 소금처럼 쏟아지는 저 적멸의 흰 달
◇봄 언저리
최덕순
해거름까지 뻐꾸기가 울고 있다
마주 보이는
공동묘지 숲 사이
온산을 흔드는 울음
그 속에는 검푸른 비밀이 있다
봄은 언제나 똑같은 학습이다
답습이 되는
뻐꾸기의 퍼즐이
붉은 머리 오목눈이 둥지에 담겨 있다
어쩔 수 없는
제 속을 토해야 살겠다고
저를 알아달라고
이른 새벽부터 울기도 했다
그가 쏟아낸 핏빛 눈물에
둥근 흙집 지붕이 이슬처럼 젖었다
나도 한때
아이를 친척 손에 맡긴 적이 있다
하염없이
아득하던 봄, 멍울지던 언저리
내 몸 한 곳
아직도 꿰차고 있는
먼 뻐꾸기의 울음주머니
해거름의 뻐꾸기
미어지는 소리가 서늘하다





























댓글 많은 뉴스
"참 말이 기시네" "저보다 아는게 없네"…李질책에 진땀뺀 인국공 사장
李대통령 지지율 54.3%로 소폭 하락…전재수 '통일교 의혹' 영향?
[인터뷰]'비비고 신화' 이끌던 최은석 의원, 국회로 간 CEO 눈에 보인 정치는?
나경원 "李 집착한 책갈피 달러 밀반출, 쌍방울 대북송금 수법"
김어준 방송서 봤던 그 교수…오사카 총영사에 이영채 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