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샤이 TK

김해용 논설위원

명절 때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 사이에서 피해야 할 말들이 있다. 언제 결혼할 거냐, 취직 언제 할 거냐 하는 말이다. 정치 이야기도 안 하는 게 상책이다. 정치 논쟁에 말 섞다 보면 감정 상하기가 일쑤다.

이번 설 우리 집에서도 차례와 세배 후 덕담이 오가다가 정치 이야기가 시작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정국과 차기 대선 구도가 주제였다. 박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했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탄핵당할 정도의 잘못은 없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편이 갈렸다. 접점 없는 논쟁이 고성으로 확전되기 일보 직전, 보다 못한 여인네들이 이를 진압했다. "남자들이 말 참 많네. 마, 치아뿌고 떡국이나 드이소!"

심리학에 '인지적 보수성'(Cognitive Miser)이라는 용어가 있다. 기존 관념을 바꾸려면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들어가기에 사람은 웬만해서 기존의 태도를 유지하려 한다는 이론이다. 신념을 바꿀만한 충분한 사건이나 동기가 없으면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이 이론에 의하면 사람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본다.

신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너무 크면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가 생겨난다. 시쳇말로 일종의 '멘붕'이다. 우리나라 현 정치 상황을 보면 인지 부조화를 유발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요즘 우리 국민 중에서는 대구경북 사람들이 인지 부조화를 가장 많이 겪고 있는 듯하다. 정치인 박근혜에게 20년 가까이 무한한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사에 유례없는 맹목적 애정이었다.

그런 박근혜가 무너졌다. 지지자들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선택에 잘못이 있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뼈아픈 상황이 됐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5% 아래로 추락하면서 대통령을 드러내놓고 옹호할 사회 분위기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대구경북의 상당수 지지자들은 '샤이(Shy) 박근혜'로 숨어들었다.

'샤이'하기는 TK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요즘 뉴스에서는 친박 정치인들의 얼굴 보기가 힘들다. 혹자는 침몰하는 새누리호에서 탈출해 신생 보수 정당으로 옮겼고,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실세 친박 정치인은 당 쇄신 파동 속에 정치생명 연장의 꿈마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대구경북 정치인들의 존재감이 희박해진 이유는 고유의 정치적 자산과 철학 부재 탓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친하다는 이유로, (그리 친하지도 않지만)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는 이유로 '친박 주자' 행세를 하면서 표를 얻은 정치인들이 이 혼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좌고우면뿐일 것이다. 특정 유력 정치인의 후광효과에 기댄 채 안이하게 정치를 한 데 따른 필연적 결과다.

문제는 이런 정치인들이 허다한 나머지 대구경북의 정치적 미래 역시 인지 부조화 상태에 빠졌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69년 헌정사에서 대구경북은 대통령을 5명이나 배출했지만 유산은 오간 데 없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 폐족 위기에 몰렸다. 입지는 척박해 황무지에 가깝고 찬 모래바람 휑하게 부는 정치적 공백 상황이다.

이 와중에 대구시와 경상북도를 이끄는 두 수장의 정치적 포지션이 상이해 관심을 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TK가 중심이 되어서 당을 혁신하겠다며 새누리당 안으로 더 깊이 뛰어들었다. TK의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대권 도전을 향한 의지도 숨기지 않고 있다. 비박계로 정치를 시작한 권영진 대구시장은 여론 향배를 지켜보면서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대구공항 통합이전을 차기시장 선거 승부수로 띄우면서 작금의 격변적 정치 상황에선 한 발짝 물러서 있는 모양새다. 그는 일단 '샤이 박근혜'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아무튼 지역의 국회의원들이 헤매고 있을 때 중심 잡고 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면 광역단체장이다. 두 사람 중에 누구의 판단과 선택이 옳은지, 나중에 누가 웃을지는 시간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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