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남겨진다는 것

해가 바뀌면서 사람들도 바뀌었다. 승진과 영전으로 누구는 섬을 떠났고, 누구는 섬으로 왔다. 난 사람과 든 사람 사이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난 화분이 있다. 주인보다 먼저 이 자리에 배달되어 축하 메시지를 전했을 화분들. 낯선 섬살이에서 간간이 눈 돌리면 지인들의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눈물겹도록 고맙고 반가웠을 텐데, 섬을 떠나는 사람은 화분을 챙기지 못했다.

"전임자들 화분은 아무래도 치우는 게 맞겠지?" 필요하면 누구라도 가져가라는 말과 함께 화분은 자연스레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영전을 축하합니다' '승진을 축하합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새 화분들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돌아보면 어제나 오늘이나 별반 다를 것도 없는데, 밀려난 화분에서 '남겨진다는 건 버려진다는 것'이라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버려졌다는 것에서 오는 괴리감은 선뜩하고 낯설다. 반나절이 흐르고, 하루가 흘러도 화분은 찬바람 드는 곳에 그대로 있었다. 내일까지 가져가지 않으면 다 정리하겠다는 관리인의 말이 차갑다. 언젠가 우연히 건물 뒤란, 음침한 곳에서 그가 말한 정리된 화분을 본 적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동댕이쳐진 식물들. 온 여름 땡볕에서, 혹은 엄동설한 눈발 속에서 허연 뿌리 드러내고 비들비들 말라가던 식물들이 떠올라 오래오래 마음이 쓰인다.

한 개, 한 개, 그리고 또 한 개. 이미 오십여 개의 화분이 있는 곳, 또다시 열댓 개의 화분이 추가되었다. 말라가는 잎사귀와 난석에서 퍼석하고 오래된 시간의 냄새가 난다. '아픈가 봐. 떠나간 이가 그리운가 봐. 그리고 남겨졌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가 봐.' 물을 주며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수십 번 되뇌며 말라버린 잎들을 손질한다. 언제 피고 졌을까, 질긴 열망으로 뽑아 올렸을 마른 꽃대 하나도 자른다. 수시로 살피고 말을 건넨다. 시간이 흐를수록 음영을 달리하며 잎사귀에 조금씩 생기가 돈다. 이제는 따스했던 옛 기억들을 불러들여 추억하는 걸까. 아니면 긴 시간을 함께한 상대가 아니어도 지금 얼굴 마주한 내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나란하게 자리한 화분들을 향해 막 산등성을 타고 내려온 아침 햇살이 쏟아진다. 가늘고 긴 잎사귀가 유연한 곡선을 그린다. 허옇게 말랐던 난석이 물기를 머금어 제법 갈색지다. 사랑받으며 함께할 때의 모습이 이다지도 평온한 것을. 막 분무질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잎사귀 사이에서 수상한 낌새가 난다. 겨울이 깊었다면 이것은 너무도 평온한 반란. 스스로 창조한 반색의 불꽃이 소리 없이 피어난다. 군더더기 없이 다가오는 간결한 여운이 참으로 오래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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