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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고골의 '외투'와 나의 목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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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석사)
경북대(석사)'모스크바 국립사범대(박사) 졸업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넵스키 거리

작가 고골의 작품 생각하며 걸어가

어느 틈에 바짝 따라붙은 소매치기

10년 전에 산 낡은 목도리만 빼내가

지난 4일 오전 9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눈발이 날렸지만 두툼한 외투를 챙겨 입은 덕분인지 생각보다 춥지 않다. 우버 택시를 부를까 하다가 호텔 체크인하기에도 이른 시간이라 버스와 지하철로 천천히 숙소를 찾아가기로 한다. 일정이 바쁘거나 짐이 많을 땐 꿈도 못 꿀 일이지만, 문학연구소만 방문하면 되는 짧은 일정이라 등에 멘 배낭과 작은 캐리어가 전부다.

지하철을 타고 넵스키 대로에서 내렸다. 푸시킨과 고골,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이다. 수백 년 동안 도시의 상징이었던 이 거리에는 멋진 건축물과 조각들, 욕망을 자극하는 유럽의 명품 상점들이 죽 늘어서 있다. 이제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호텔에 도착한다. 운하를 지나 걸어가니 오른쪽으로 고골의 동상이 보인다. 넵스키 거리의 인간 군상들을 흥미롭게 그려냈던 작가이니 이 거리의 파수꾼으로 제격이다.

동상을 보면서 작가의 유명한 단편 '외투'를 떠올렸다. 주인공 아카키는 가족도 친구도 희망도 없이 공문 정서만 하면서 살아가는 중년의 초라한 말단 관리였다. 그런데 그에게도 마침내 삶의 의미가 생겼다. 계속 수선해 입던 헌 외투가 더 이상 손도 못 댈 정도로 낡아 버리자 재봉사가 새 외투를 맞추라고 제안한 것이다. 박봉에 새 외투 구입을 꿈도 못 꿨던 주인공은 마침내 결심을 하고, 몇 달 동안 허리띠를 졸라매고 돈을 모은다. 옷감도 사고, 무슨 털을 붙여서 어떻게 외투를 만들지 재봉사와 의논하니 흡사 새 인생이 시작된 것 같다. 그렇게 완성된 외투를 입은 아카키, 살을 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추위도 남의 일이다. 세상을 다 가진 듯 어깨가 펴지고, 미녀도 상냥한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는 것 같다. 난생처음으로 동료의 저녁 초대도 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낸 아카키. 그러나 집으로 가던 중 넵스키 거리에서 외투를 강도당하고 만다. 경찰서를 찾고 유력 인사에게 탄원도 하지만 관료주의의 높은 벽을 실감할 뿐, 외투를 찾지 못한 주인공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린다. 약간은 허무한 이 결말에 작가는 아카키의 유령이 넵스키 거리에 출몰해서 사람들의 외투를 벗겨간다는 에필로그를 덧붙였다. 시대의 부조리를 잘 파악했던 천재였지만 황제로부터도 인정받고 싶어 했던 고골다운 비현실적인 결말이다. 추운 겨울, 가난한 관리에게 외투 하나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넵스키 거리는 여전히 아름답고도 비정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광기에 차서 원고를 불태우고 굶어 죽었던 작가 고골의 최후를 떠올리면서 동상을 지나갔다. 이제 저 모퉁이 약국에서 우회전해서 50m만 더 가면 호텔이다. 캐리어를 끌면서 걸어가는데 어쩐지 뒤가 서늘하다. 건장한 남자 두세 명이 아까부터 내 뒤에 붙어서 오고 있다. 배낭을 등에 멘 것이 마음에 걸린다. 슬쩍 돌아보니 약국 문 여는 시간표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멀쩡한 신사들이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아 호텔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내 뒤에 오고 있다. 바로 옆 이탈리아 명품 가게 유리창에 흘깃 비춰보니 배낭이 열려 있다. 황급히 돌아보니 남자들은 저만치 돌아서서 가고 있다. 한발 늦었다. 안에 들어 있던 지갑과 여권, 휴대전화는 이미 저들의 손에 있을 것이다. 고골을 생각하느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악명 높은 소매치기들에 대해 잊고 있었다니.

자책하면서 호텔 로비로 들어와 배낭에 손을 넣어 보니 지갑도 휴대전화도 노트북도 그대로이다. 내 배낭을 열었던 자들이 꺼내 간 것은 10년 전에 산 목도리 하나였다. 생각보다 안 추워서 둘둘 말아 배낭 맨 위에 넣어 둔 긴 목도리를 눈치 못 채게 꺼내느라 시간을 다 써 버린 소매치기들은 정작 그 아래 있던 지갑과 휴대전화를 빼낼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고골 이후 200년이 지난 지금도 넵스키 거리는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그들이 가져간 것이 새 외투가 아니라 낡은 목도리일 따름에 안도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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