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민의 에세이 산책] 백화점이라는 무대

새로 생긴 백화점에 들렀다가 시계 매장 앞을 지나게 되었다. 시계는 내가 쇼핑 욕구를 느끼는 거의 유일한 물건이다. 시계는 단지 시간만을 알려주는 물건이 아니다. 크로노그래프와 GMT 기능이 있는 시계는 시계를 착용한 남자를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성공한 자처럼 보이게 만든다. 물론 내가 그런 남자라서 명품시계를 동경해온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시계 하나로 그런 이미지를 갖고 싶어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명품시계 구매는커녕 시계 매장에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가격도 물론 큰 이유였지만 매장 내 손님이 별로 없는 시계 매장은 뭔가 모르게 들어가기 부담스러웠다. 그날도 발걸음을 돌리려다 문득 내가 시계매장에 들어갈 정도의 모험 정신도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져 매장에 들어가 봤다. 직원은 내게 B사의 시계를 추천해줬다. 시계를 살펴보며 직원이 눈치 채지 않게 가격표를 힐끗 보고, 가격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로 직원에게 가격을 물었다. 나는 살 마음이, 아니 살 능력이 없었지만 다른 시계들도 보여 달라 했다. 가격을 듣고, 그 가격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나는 직원에게 "가격은 좋은데, 다이얼 장식이 마음 들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다른 매장을 보고 오겠다고 했다. 직원은 둘러보고 다시 오라고 했다. 물론 나는 다시 가지 않았다.

시계 매장을 나오며 어빙 고프만이 '자아 연출의 사회학'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공연된 자아는 그럴듯하게 연출하여 남들로 하여금 그를 그가 연기한 인물로 보게 만드는 일종의 이미지다." 나는 시계 매장에서 내 연기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구매 능력은 없지만 구매자처럼 행동했고, 직원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직원은 내가 구매 능력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채고도 적당히 맞장구쳐 줬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백화점, 그중 명품매장은 무대가 되어 나 자신을 내가 '공연한 자아'로 점차 믿게 만드는 곳임을 깨달았다. B사의 시계가 내게 특히 잘 어울린다는 직원의 말이 오래 남았다.

명품이 즐비한 새로 생긴 백화점을 무대로 나는 '공연된 자아'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시계가 단지 시간을 알려주는 물건이 아니듯 백화점도 단지 물건을 파는 곳만은 아니다. 그래서 무대 위의 우리 배역이 오직 '고객님'이 되도록 모든 것을 사전에 세팅해 두고, 우리를 구매 능력이 있고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고객님으로 대우한다. 그렇게 우리는 백화점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출된 나 자신을 자기 자신의 자아로 믿으며 조금씩 쇼핑의 즐거움에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연기에 너무 도취되지 말아야 한다. 백화점은 영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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