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3월 29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한 편의 인터뷰 기사가 시선을 끈다. 인터뷰 대상은 작가 장혁주이며 기자는 이활, 즉 이육사이다. 인터뷰의 목적은 장혁주(張赫宙)의 소설 '아귀도'(餓鬼道)가 일본 유명잡지 문예현상모집에 입선한 것을 기념하려는 것이었다. 일본 유명잡지 문예현상모집에 조선인이 입선한 것이 처음이었던 만큼 장혁주의 입선 사실은 조선 사회는 물론, 일본 문단에서도 큰 이슈였다. 무명의 조선인이 1천200대 1의 경쟁을 뚫고 일본 샐러리맨 월급의 열다섯 배에 달하는 거액의 상금을 탔다는 점도 화제를 배가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인터뷰를 진행한 이육사의 관심은 이런 세속적인 것과는 달랐던 것 같다. 1932년 3월의 조선은 뒤숭숭했다. 식민지의 삶이라는 것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그해는 특히 더 했다. 만주 만보산에서 조선 농민과 중국 농민이 충돌한 사건(1931)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참혹한 살육극이 중국과 조선에서 교대로 자행되었다. 바로 이 시기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 어지러운 시기에 장혁주가 식민치하 '조선농민'의 참혹한 삶을 다룬 소설을 써서 일본 유명잡지 '개조'의 문예현상모집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제국 일본의 폭력적 지배 실상을 겁도 없이 제국의 중심부에서 터트린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 쾌거에 대해 이육사가 느낀 감동은 상당히 컸던 듯하다. 장혁주의 눈빛을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일본 아나키즘 대부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의 눈빛에 견주어 설명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때문일까. 이육사는 조선인 장혁주가 '조선어'를 두고 '일본어'로 소설을 창작한 것에 대해 다소 꺼림칙한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별것 아닌 것으로 돌리고 있다. 일본어 소설로 일본 문단 등단을 겨냥한 장혁주의 심리에 대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일본의 침탈에 반기를 든 장혁주의 용기와 신념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터뷰 직후 두 사람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린다. 이육사는 만주 조선무관학교에 입학하려고 조선을 떠나고, 장혁주 역시 몇 편의 통속소설을 발표하다가 일본으로 이주한다. 다시 몇 년 뒤 이육사는 항일운동을 하다가 북경 감옥에서 옥사하고, 장혁주는 친일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일본인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가 되어 일본 땅에서 불우하게 삶을 마감한다. 이육사와 장혁주는 항일과 친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었고, 자신들을 둘러싼 '식민지 조선과 제국 일본'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분열되어 버린 것이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이 되고 70년이 훨씬 더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식민지 시대와는 다른 형태로 분열되고 있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대통령 탄핵 문제를 놓고 찬성과 반대로 분열되어 선택을 강요당하던 우리가 아니던가. 선택의 막다른 골목에 선 그 숨 막히고 암울한 상황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 누구도 역사의 시계를 분열과 단절의 과거로 돌려놓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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