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수호의 의지가 없다는 근거
대통령 수사·압수수색 거부 제시
솔직히 괘씸하다고 해야 옳았다
문명국의 감정적 판결문에 절망
대통령이 파면됐다. 솔직히 말해 놀랐다. 아무런 소수의견이 없는데 놀랐고, 전원일치 결정이라는 데 놀랐다. 아, 우리 민주주의의 수준이 이 정도였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적어도 헌법재판소는 헌법을 해석하는 최고재판소로서 권위를 스스로 버렸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전제할 사실이 있다. '대통령의 파면이 정당하다'는 사실 말이다. 작년 10월 24일 사건이 터진 직후 나는 방송에서 이것은 최순실 게이트이자 박근혜 게이트라고 말했다. 그 뒤 최순실이 국무회의에 간섭하고 비서관회의 말씀 자료까지 챙겼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는 탄핵을 주장했다. 그건 대통령은 인형이고 최순실이 인형 조종자라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스스로 민주주의 시스템을 파괴했던 것이다. 대통령은 우리가 선출한 우리의 대표자였지만 그녀는 대표권을 최순실과 주변 탕아(蕩兒)들에게 바쳤다. 그건 권력 농단이었고, 권력의 사유화였다. 그래서 의원들이 거리에 나갈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탄핵소추안을 발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순실 일당이 저지른 여러 '범죄'에 대통령이 가담했든 방치했든 묵인했든 간에 대통령은 정치적 책임은 물론 법률적 책임도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억울할 것이다. 미르니 K스포츠니 하는 재단에 대기업을 옥죄어 출연하게 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런 일은 전(前) 정부에서도 있었지 않았던가? 주변에서 권력을 팔아 해먹은 게 어디 이 정부에서만 있는 일인가? 형들이 해먹고 아들이 해먹고 심지어 대통령의 아내가 돈을 받지 않았던가? 어느 정부든 권력 말기에 부패 스캔들이 터졌지만 아무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다. 금액으로 치면 박근혜정부는 어느 문민정부보다도 깨끗하다고 외치고 싶을 것이다. 아마도 광장에 나가 '대통령을 처단하자'는 촛불 민심에 가담했던 정치인들 역시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시민들은 들끓었을까? 깃발을 든 촛불시위 주최 측이나 숟가락을 얹었던 불순세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에 분노해 촛불을 든 멀쩡한 시민들 말이다. 그들이 터뜨리는 울화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아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 시민들의 분노는 대통령을 가지고 논 자들이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최순실 일당이라는 데 있다. 청와대 수석이 최순실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고 권력을 전횡한다던 문고리 3인방 역시 그녀의 종복(從僕)이었다는 데 있다. 쉽게 말해 대통령은 최순실 일당의 허수아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탄핵결정문에 이의를 제기하는가? 그것은 헌재 재판관들의 고뇌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탄핵소추안부터 문제가 있는 재판이었다. 국회는 터무니없는 소추안을 만들었다. 탄핵사유로 열거한 헌법 위반 항목 절반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게다가 법원 판결로 증명되기는커녕 수사조차 시작하지 않은 뇌물이니 하는 범죄를 열거한 법률 위반 항목은 소추안을 작성한 자가 얼마나 감정적인가를 증명할 뿐, 적어도 그 당시에는 탄핵사유로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걸 주심재판관은 친절하게도 국회가 정리할 수 있게 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이정미 재판관 퇴임 전 선고를 밀어붙였다. 재판관의 퇴임을 이유로 재판을 끝내자는 주장을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놀랍게도 헌재는 두 번씩이나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도 헌재의 결정문엔 소수의견 하나 없었다. 적어도 소추안의 탄핵사유 13개 항에 대해 충분한 심리가 있었다면, 그 흔적은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더 괴이한 것은 대통령이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는 걸 결정적 이유로 든 것이다. 헌재는 대통령이 검찰과 특검의 수사와 청와대 압수수색을 거부하는 등 헌법 수호의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법 위배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헌법 수호 의지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단순한 비문(非文)이 아니다. 대통령이 검찰과 특검에 고분고분했다면 법 위배 행위는 저절로 '반복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다툰다면 헌법을 방기(放棄)하는 것인가? 솔직히 괘씸하다고 해야 옳았다.
어쨌든 헌재 결정문은 번복되지 않는다. 대통령은 파면됐다. 나는 그녀의 파면에 찬성한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적어도 민주국가라면 그리고 문명국이라면, 이따위 감정적인 비문으로 선출 권력을 파면한다는 건 소름이 돋는 일이다. 무려 석 달 넘게 온 국민을 파김치로 만들다시피 한 끝에 내놓은 결정문이 이 정도라는 데 나는 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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