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소망적 사고

태평양전쟁때 일본군이 육전(陸戰)에서 미군에 처음 패배한 전투가 1942년 8월 7일 미군의 기습 상륙으로 시작돼 4개월간 지속된 과달카날 전투이다. 미국의 본격적인 반격의 시작이었지만 일본 군부는 일종의 정찰 작전 또는 일본이 건설 중이던 비행장 파괴가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격도 소규모 병력을 찔끔찔끔 투입하는 식으로 전개했다. 결과는 대패였다.

일본 군부가 이렇게 안이하게 대응한 배경에는 미국의 반격은 빨라야 1943년 이후에나 시작될 것이란 판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근거 없는 '소망적 사고'에 불과했다. 그러니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는 이미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보다 1년 전인 1942년 6월 4~7일 일본 주력 항공모항 4척이 모두 격침되고 중일전쟁 때부터 활약해온 베테랑 전투기 조종사 대부분이 전사한 미드웨이 해전의 대패도 마찬가지다.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를 치려는 계획을 미국이 전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작전 개시 한 달 전인 1942년 5월 1~5일 도상(圖上) 모의 전투에서 미군 항공모함의 공격으로 일본 함대가 큰 피해를 입는 결과가 나왔으나 일본 해군 수뇌부가 가능성이 낮다며 일본 함대가 승리하는 것으로 결과를 뒤바꾼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암호 해독을 통해 일본 해군의 움직임을 훤히 꿰고 있던 미군 함대는 일본 해군의 모의 전투 시나리오대로 미드웨이 섬 북서쪽에 매복한 채 일본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일본의 대미(對美)전쟁 전체가 출발부터 소망적 사고였다. 진주만 기습을 지휘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구상이기도 한 일본의 전쟁 계획은 미국 태평양함대에 타격을 준 뒤 미국이 회복하기 전에 평화협상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1월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영국 처칠 총리와 만나 연합군의 전쟁 목표를 적의 '무조건 항복'으로 결정했다.

한미 관계사의 대표적 학자인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한국 외교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망적 사고"라고 비판했다. 그는 '한일 과거사 문제에서 미국은 한국의 손을 들어줄 것' '중국은 북한을 포기할 것' '한중관계가 근접해도 미국은 방관할 것'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면서 앞으로 한미동맹의 양태는 다양한 형태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하고 다음 정부의 대비를 주문했다. 대선 주자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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