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이다.
금릉은 침상에서 눈을 뜬다. 비단 이불 위로 허연 허벅지가 비져나와 가위처럼 걸쳐져 있다. 어맛, 누가 문 열지 않았나. 금릉은 기겁하고 이불 밑으로 다리를 감춘다. 창호지에 걸러진 빛이 이불에 수놓인 붉은 목단 위로 옹송그린다. 골목을 지나가는 방물장수 소리, 말발굽 소리가 창호지를 두드린다. 지게에 얹힌 놋그릇이 달그닥달그닥 서로 부딪치는 소리도. 금릉은 아직 일어날 생각이 없다. 머릿속에 어젯밤 일이 꿈결처럼 너울댄다. 석재 선생이 소매 자락을 흔들며 치마 위로 휙휙 치올리던 대나무가 눈앞에 아슴아슴하다. 그 기억으로, 마치 사내와 일이라도 치른 듯 뼈마디가 기분 좋게 나른해진다.
점심이 다 되어 금릉은 침상에서 일어난다. 대충 세면을 하고 점심상에 가서 앉는다. 상이 차려지는 동안 기녀 아이들과 흥겹게 재잘댄다. 흰 쌀밥에 김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반찬은 동치미와 김치뿐이다. 술상에 올랐던 잔안주는 일하는 아낙들이 집으로 가져갔지만 기녀들도 술상 안주가 식탁에 오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술 냄새가 덮인 반찬은 맛이 느끼한 것이다.
"금릉아, 명화에서 널 찾네. 나가 볼래?"
명화는 읍성의 동북쪽, 동장대 앞에 있는 일인 요릿집이다. 앵무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굳이 강제하는 투가 아니다. 이즘 들어 기루에 손님들이 줄어서 살림이 팍팍하다는 걸 금릉은 잘 알고 있다. 게이샤들이 대구에 꽤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앵무 아주머니가 막무가내로 지시했으면 어떤 핑계라도 댔을 테지만 궁한 살림을 표내지 않으려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금릉은 활짝 웃으며 가겠다고 대답한다.
"가야금을 가져 오래요?"
"아니다. 일식집이라도 장구는 있을 거야."
장구는 가야금을 돕기도 하지만 노래에 장단을 맞출 때도 필요하다.
세시가 되어 금릉은 기루를 나선다. 점심 나절에 하늘이 침침하다 싶었는데 눈이 조금씩 흩날린다. 솜옷을 받쳐 입어 춥지 않으나 눈이 오면 오히려 포근하다. 서문 앞 삼거리에 이르자 잠깐 갈등에 싸인다. 어느 쪽으로 갈까. 북문 길로 가면 흉하게 무너져 있는 성을 봐야 한다. 성 안으로 가는 것도 일본 군인들이 많아 꺼려진다. 갈팡질팡 하면서도 금릉의 걸음은 서문을 통과한다. 성 안을 가로지르는 게 지름길이다.
성 안에는 일인들이 부쩍 늘었다. 성곽의 북쪽 면이 헐어져 있어, 그 바깥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일인들이 이미 문턱처럼 낮아진 성곽 터를 밟고 드나들었다. 성 안은 경상북도 관찰부와 대구군아, 일본 이사청과 경시청, 수비대가 뒤섞여 있었다. 금릉은 일본 수비대가 보초를 서는 이사청 앞을 빠르게 지나간다. 이사청만 아니라 곳곳에서 목덜미에 총을 세운 채 부슬부슬 내리는 눈을 맞고 있는 기병과 보병들을 만난다. 수성창(修城倉) 지붕에 가지를 드리우는 아름드리 회나무를 지나 동문(東門)으로 빠져나간다.
금릉은 그제야 우산을 편다. 눈이 많이 내리진 않지만 머리가 젖을 것 같다. 동문 밖에는 지난 가을부터 일식 점포들과 큰 규모의 의료원이 속속 지어지고 있었다. 지금은 혹한기라 공사가 중단되어 거리가 어수선하다. 요릿집 명화는 교전동이 끝나는, 기차 정거장 물류창고가 보이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금릉은 일식 건물인 명화 안을 기웃거리다 요릿집 주인과 마주친다. 주인을 따라 마당으로 들어서서, 우산을 마루 기둥에 세워 둔다. 겉문이 열리고, 그녀는 유리문 안으로 길게 놓인 장마루를 사뿐사뿐 디딘다. 안쪽에서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가라고 주인이 손짓한다.
방 안의 광경에 금릉은 놀라워 한다. 이미 상이 차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음식도 휘저어져 있다. 두더지 모양으로 둥글게 말은 돈돈야키가 절반이나 뭉개져 있고 생선을 튀긴 가라아게도 접시에 한두 점만 담겨 있다.
남자가 넷이고 여자는 셋이다.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여자는 하나만 기모노를 입었고 나머지는 평상복 차림이다. 한 남자가 금릉의 팔을 잡고 끌어당긴다. 금릉은 아연해 하면서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남자 곁에 앉는다. 자옥한 담배 연기에다 억센 일본어가 술상 위로 질펀하게 오고 간다. 거칠고 빠른 일본어는 마치 욕설처럼 들린다. 옆 남자가 금릉에게 술을 따른다. 독주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사래가 들어 컬럭컬럭 기침한다.
장구가 보이지 않는다. 금릉은 장구로 장단을 맞추지 않는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다. 떠들썩하던 방 안이 일순 쥐죽은 듯하다. 그녀의 노래를 기다리는 시늉이다. 저들이 바라는 건 잡가일 거다. 그녀는 판소리나 잡가를 부르지 못한다. 그렇다고 노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잔기침으로 간신히 목젖을 다스린 뒤, 느린 정악(正樂)인 '죽지사'를 입술에 띄운다. 이내 방 안이 왁자하게 소란해진다. 그녀는 중간에 노래를 그친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되풀이 되고, 남자와 여자들이 짝을 맞추어 옆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혼자 남은 남자가 그녀의 치마를 들친다. 그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저고리를 풀지 못하게 완강히 어깨를 움츠린다. 그녀는 남자를 힘껏 밀친다. 다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뒤에서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방에 내동댕이친다. 치마끈이 풀리면서 몸이 빙그르르 돌아간다. 남자의 손바닥이 얼굴에 철썩 달라붙는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는다. 몇 개의 손이 달려들어 옷을 벗긴다. 옆방으로 갔던 다른 남자가 돌아온 듯하다. 금릉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듯, 몸 어딘가에 거친 충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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