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강 방어선 무너지면 대구'부산 다 뚫린다" 55일간의 사수작전

한국전 최후의 보루를 가다

다부동전적기념관에는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를 상징하는 전적비가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에는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를 상징하는 전적비가 있다.
왜관철교는 한국전쟁 때 낙동강 방어를 위해 폭파됐다
왜관철교는 한국전쟁 때 낙동강 방어를 위해 폭파됐다
한국전쟁 때 전투가 벌어졌던 가산산성의 모습.
한국전쟁 때 전투가 벌어졌던 가산산성의 모습.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전시된 총기를 둘러보는 관람객의 모습.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전시된 총기를 둘러보는 관람객의 모습.

파죽지세 북한군에 전세 뒤집는 결정적 싸움

55일간의 사투…국군 1만여명 죽거나 다쳐

◆'역전 분수령' 다부동 전투

1950년 8, 9월은 한국전쟁의 분수령이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을 맞아, 국군과 유엔군이 필사의 전투를 벌였다. 전쟁 발발 35일 만에 낙동강까지 후퇴했다. '의성~청송~영덕'의 북쪽 방어선이 '칠곡~영천~경주~포항'까지 밀렸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임시수도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겼다.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 무렵 가장 중요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경북 칠곡이다. 가산면 다부리 일대의 '다부동 전투'는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됐다. 당시 전투를 '다부동전적기념관'이 간직하고 있었다. 입구의 25m 높이 기념비와 탱크 모양의 기념관을 갖추고 있었다. 전쟁 당시의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나타내고 실제 상용한 무기가 전시돼 있었다. 수색을 통해 발견된 유골이 기념관 입구에 안장돼 있었다.

기념관 북서쪽에 유학산(839m)이 병풍처럼 막아섰고, 동쪽에는 일대에서 가장 높은 가산(902m)이 버티고 있었다. 산들이 방어막이 되는 자연지형을 지녔던 것이다. 능선으로 이어진 다부동의 20㎞ 방어선이 뚫리면 남쪽 10㎞ 지점의 도덕산(660m)까지 병력을 철수해야 하고, 대구가 포병의 사정권 안에 들어가게 된다. 전투가 치열했던 이유다. 다부동 전투는 국군이 9월 24일 구미 인동 천생산 진지를 탈환할 때까지 55일간 이어졌다. 북한군 2만4천여 명과 국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 피해를 냈다. 북한군 3개 사단이 패배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는 발판이 됐다. 당시 전투에 참여한 조지훈 시인은 '다부원에서'라는 시를 남겼다.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길옆에 쓰러진 괴뢰전사/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호국의 최전선, 왜관

낙동강은 낭떠러지와 같았다. 최후의 방어선을 낙동강에 쳤다. 낙동강이 무너지면 대구가 함락되고 부산도 장담할 수 없었다.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 동안 낙동강에서 버텼다. 최전선은 왜관이었다. 북한군이 8월과 9월 두 차례 공세로 낙동강 방어선을 뚫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를 바탕으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졌고, 다음 날 낙동강 방어선 전역에서 아군의 총반격이 이뤄져 전세를 뒤집었다.

낙동강을 따라 만날 수 있는 '호국의 다리'(옛 왜관철교)와 '칠곡호국평화기념관', '왜관지구전적기념관' 등이 긴박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1~4일 사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왜관철교(3일 오후 8시 30분쯤)를 폭파했다. 북한군이 철교를 통해 강을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호국의 다리로 이름 붙여진 배경이다. 칠곡호국평화기념관 동남쪽 자고산(303m) 일대에서 8월 13~17일 미군과 북한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자고산 303고지는 북한의 공격로를 통제할 수 있는 요지였다. 13일 밤 북한군은 수암산(519m) 서쪽에서 수중교로 강을 건넜다. 14일 오후 303고지로 접근했다. 15일 아침 북한군이 303고지를 기습했다. 미군은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박격포 소대가 포로로 잡히고, 고지 정상에 있던 또 다른 중대가 포위됐다. 미군은 구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포로로 잡힌 미군 박격포 소대원 40여 명이 자고산 기슭에서 학살당했다.

자고산 전투 중이던 16일 칠곡호국평화기념관에서 강 건너다보이는 약목면 일대에 유엔군의 융단폭격이 이뤄졌다. 일본에서 출격한 B29기 96대가 그날 11시 58분부터 26분 동안 왜관 서북 지역에 400~900㎏형 폭탄 약 900t을 투하했다. 폭격으로 낙동강 주변에 있던 북한군 화력 지원부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영천을 사수하라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한 북한군은 영천 공략에 나섰다. 8월 20일 북한군 제15사단이 의성을 거쳐 영천 동북쪽으로 이동했다. 영천을 차지하면, 국군을 분리하고 낙동강 동서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어서다. 북한군이 영천을 거쳐 대구에 진출하면 왜관과 다부동 일대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이 차단돼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위험해진다. 영천에서 경주로 가서 북한군 제12사단과 합세하면 부산까지 위급해진다.

북한군은 보현산 일대 국군의 방어가 취약한 점을 틈타 기습적으로 영천을 점령했다. 국군은 금호강변에서 북한군의 확대를 저지했다. 9월 6~8일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시가전이 펼쳐졌다. 영천 북쪽의 국군이 북한군을 저지하고, 다른 부대가 적의 후방부대와 보급로를 차단했다. 남쪽의 국군은 영천을 통과해 선두부대를 저지하면서 북한군을 포위했다. 10일 영천~경주 도로 남쪽에서 반격을 시작해 4일 만에 이전의 방어선을 회복했다.

영천전투에서 국군은 낙동강 전선 동부 방어에 성공했고, 북한군은 작전에 차질을 빚어 9월 공세가 실패하게 됐다. 이를 기리고자 1980년 교촌동에 '영천지구전적비'를 건립했다. 2001년에는 고경면 청정리 '국립영천호국원'을 조성했다. 호국원에는 영천 대첩비와 전투장비 전시장, 충렬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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