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진중권의 새論 새評] 흉물이냐 명물이냐

서울대(미학과 학사·석사) 졸업.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전 중앙대 겸임교수
서울대(미학과 학사·석사) 졸업.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전 중앙대 겸임교수

버려진 신발로 만든 슈즈 트리 논란

'냄새난다' 일부 언론도 혐오 부추겨

문명 비판 '정크 아트' 이해 못한 편견

철거 때까지 며칠 못참는 건 불관용

'슈즈 트리'가 논란이 된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는 버려진 신발들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작품을 놓고 호오가 갈리는 것이야 미술계에 늘 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기려던 차에 "비가 오니 냄새가 난다"(혹은 "비가 오니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비난하는 몇몇 언론의 어이없는 행태에 참다못해 이 자판을 두드리게 됐다.

작품을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고, 그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온당한 '비평'이 되려면, 그 즉발적 감정을 합리적인 논리와 근거로 뒷받침해야 한다. '슈즈 트리'를 혐오하는 이들 역시 제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 근거를 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 근거들이 미학 전공자인 내 귀에 그리 합리적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언뜻 살펴보니 그들의 주장에는 크게 세 가지 편견이 엿보인다.

첫째 미술의 재료에 대한 편견이다. 혐오자들은 일단 작품의 재료가 신다 버린 신발이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표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애초에 쓰레기를 재료로 한 '정크 아트'(junk art)다. 그러니 쓰레기를 재료로 삼았다는 사실을 비난하면 상당히 난감해진다. 문제는 재료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했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둘째, 미술의 본질에 대한 편견이다. 즉 작품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술이 꼭 예뻐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공 미술은 환경 미화가 아니다. 정크 아트는 소비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 비판의 일환으로 소비사회의 폐기물들을 '리사이클링', 아니 미적 가치를 가진 작품으로 '업사이클링' 하는 것이다. 정크 아트의 바탕에는 대개 생태주의 정신이 깔려 있다.

'미적 가치'를 가졌다는 말은 '예쁘다'를 뜻하는 게 아니다. 쓰레기라는 그 물리적 대상 위에 '의미'의 층위, '개념'의 층위가 얹혀 있다는 것을, 즉 그 물리적 대상이 동시에 '해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층위를 무시하고 작품을 쓰레기 더미로 간주하는 것은 미학적으로 그리 성숙해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왜 신다 버린 신발을 재료로 선택했을까? 일단 그곳이 수제화 만들던 가게들이 늘어서 있던 염천교 근처이고, '서울로'는 걸어다니는 보행로이니 그것의 상징으로 신발만큼 적절한 것도 없을 것이다. 나아가 '서울로' 자체도 용도 폐기된 낡은 고가도로였으나 서울 시민들을 위한 새로운 공중 보행로로 거듭났다. 이를 상징하는 평행의 전략으로 작가는 신다 버린 신발들을 작품으로 변용시킨 것일 게다.

물론 작품이 낯설게 느껴질 수는 있다. 그 경우 '이상하다'는 느낌에서 바로 '흉물'이라는 결론으로 비약할 게 아니라, '작가가 대체 왜 그랬을까'라는 물음으로 옮아갈 일이다. 버려진 신발에서 악취만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을 신고 다니던 서민의 삶을 연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독한 신발에서 냄새만 맡는 사람들의 태도야말로 어쩌면 신발의 업사이클링을 통해 작가가 비판하려 한 세태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은 공공 미술이 모든 이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편견이다. 동일한 작품을 놓고 논란이 일 수 있다. 그 논쟁 자체도 현대 예술의 한 부분이자 전략이다. 또 다수가 비난한다고 무가치한 작품인 것은 아니다. 에펠탑은 당시 거의 모든 이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파리의 명물이 되어 있다. 예술은 다수결이 아니다. 그 앞에 '공공'이 붙었다고 예술이 예술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 편견으로 무장한 대중은 SNS를 통해 작품에 무차별적 비난을 퍼부어댔다. 일부 언론도 거기에 편승해 이를 부추겼다. 급기야 예산이 어쩌구 하는 치사한 얘기까지 흘러나온다. 이런 식으로 조리 돌림을 하면 작가들이 자기 검열을 하게 되고, 그러면 과감한 실험은 사라지고 무난한 환경 미화만 남을 것이다.

무난하게 예쁜 흉물들은 그동안 너무 많았다. '슈즈 트리'는 일시적인(ephemeral) 작업으로,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철거될 것이다. 개념 있게 흉한(?) 작품은 기록으로라도 남으나, 개념 없이 예쁜 작품은 기록으로 남을 가치도 없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제 마음에 안 든다고 그 며칠을 못 참아주는 이 사회의 불관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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