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십자성은 북위 33도 이남에서만 보이는 남반구의 별자리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 별자리를 볼 수가 없다. 이 때문일까. 매력적이며 낭만적 이미지를 지닌 남십자성은 소설이나 시, 때로는 유행가 소재로 종종 사용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남쪽 나라'라는 단어에서 묻어나오는 낭만적 판타지가 중첩되어 있다. 투명하게 푸른 바다와 멋진 야자수 나무 그늘이 펼쳐지는, 언제나 여름인 곳! 남십자성이 빛나는 남쪽 나라는 언제부터인가 이처럼 일종의 판타지 같은 이상적 공간으로서 우리에게 인식됐다.
우리 사회에서 '남쪽 나라'를 '남방'이라 부르며, 남방과 관련한 낭만적 이미지가 급격하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1942년, 일제강점기 말기였다. 이 시기 '남방'은 '희망'의 상징으로 통용되어 온 막연한 '남쪽 나라'가 아니라, 말레이반도에서 인도차이나반도에 이르는 지역, 즉 동남아를 지칭하고 있었다. 최정희의 '남방으로 보내는 꿈'(1942. 3.)은 일제 말기 조선에 유포되던 '남방 붐'을 집약시킨 시이다. 이 시는 낭만적 제목에 걸맞게 "남성(南城) 머언 나라에 겨울이 없다는 것은 내가 파랑새의 노래를 배우면서부터 알았다"라는 감성적 구절로 시작한다.
시에서 묘사하는 남방은 천국과 같은 곳이다. '南城 머언 나라', 즉 남방은 "숲 그늘에 에비스草(초)의 열매가 포도송이처럼 푸들어 익어가고, 亞弗利加(아프리카) 튜립과 赤素聲(적소성)이 늘 피어 있어서 따스한 바람이 하늘에서 불어 바다에 퍼지는 날이면 꽃들이 각각 저들의 자랑이 빨간 냄새, 하얀 냄새, 노랑 냄새를 뱉어버"리는 곳이다. 시인 최정희는 이렇게 꿈 같은 남방을 혼자 알고 있기가 아까웠던지, 시 말미에 "사시장철 어느 때나 찬미를 잊어 안 버리고 살 수 있는 이곳으로 가잔 말이다"고 독자들에게 함께 가기를 권유한다.
그러나 시인의 달콤한 말과 달리 남방은 조선인의 꿈의 땅이 아니었다. 일제는 중일전쟁(1937)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새로운 경제적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남방은 이 모색 끝에 발견한 일본제국의 희망의 땅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2년 '남방'은 시인의 말처럼 함께 손잡고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의 전화(戰火)가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 곳이었다. 시인은 바로 그 죽음의 공간으로 함께 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최정희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수많은 문인과 지식인이 조선 젊은이들에게 일본제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남방, 그 죽음의 공간으로 나갈 것을 권유하고 나섰다.
태평양전쟁에서 사망한 조선인 수가 적게는 이만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이 최정희의 시 한 편 때문에 죽으러 나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문학과 예술은 때로는 시대와 권력과 정치를 초월하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기 동안 우리는 문학이 제국의 권력에 이용되던 폭력적인 상황을 경험하였다. 그런 우리가 또다시 예술과 권력의 비정상적 관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조선 젊은이들이 일본을 위해 희생된 지 불과 백 년도 지나지 않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의 말이 또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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