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에 불을 지를 수 없소. 광문사 문회 날짜와 너무 가까워요."
광문사에서 열리는 문회는 이틀 후인 29일이었다.
"그게 뭔 소리야? 광문사 행사는 언제나 있는 거고, 그게 우리와 뭔 상관이란 말이오!"
계승은 어둠 속에서 오돌매가 칼을 빼들고 자신을 겨누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승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문회는 예전과 다른 거 같소. 나흘 전에, 김광제 회장의 지시를 받고 내가 도내 각처에 있는 회원 유지들 3백 명에게 편지를 뛰었어요. 멀리 함경도까지 초청장을 보냈어요."
"함경도?"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는 최대 인원이 대구를 찾을 거요. 3백 명이 온다면 하인이나 종자(從者)를 합하면 적어도 5백은 되겠죠. 타고 온 말들도 성 안에 북적일 거고."
"흥, 서석림이나 김광제, 이 자들 마음에 들지 않소. 서석림은 어릴 때 배가 고파 멍석을 뜯어먹으며 가난을 알았고, 김광제는 을사년(1905년)에 황제폐하께 피 끓는 상소를 올린 뒤 경무관을 때려치웠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다 헛소리요. 아니꼽게 진화론 따위나 입에 달고 살지. 아이들에게 책을 건네고, 거지들과 궁민(窮民)들에게 국수를 먹이며 잘난 체하지. 오일장 다음날에 국밥을 얻어먹으려고 문둥이 떼거리들이 머리통에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나 장사가 안 될 판이야. 정말 가증스러워. 그게 사실 자신의 몸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 해서지. 서석림과 김광제는 결코 손에 칼을 들지 않아. 흥, 대신 커피 잔이나 들고 있잖아? 저 둘이 광문사 앞에서 일본 수비대 장교들과 시시덕거리며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지."
계승은 느꼈다. 젊은 시절에 한인들끼리 상권을 지키려고 수창상회를 열었고 이제 쉰 살이 넘어 교육과 금융 사업에 손을 대고 있는 대구의 상층부 상인들과 20대 젊은 상인들이 규합한 달성회가 갈수록 길이 갈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염미두(魚鹽米豆). 보부상 출신인 거부(巨富)들의 손에는 더 이상 생산 비린내가 풍기지 않았고, 쌀겨 한 알도 등에 붙어 있지 않으니 젊은 한인 상인들의 절실함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농장과 학교 건설, 은행 운영에 관심을 두고 있는 저들의 눈에는 어쩌면 시장터의 젊은 상인들이나 일인 장사꾼들이 한 가지로 비칠지 몰랐다. 일본 장사꾼들도 거류민 지휘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콧구멍만한 점포를 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죄다 철도 공사 때 일본에서 건너온 막노동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집요하게 장사하는 콧구멍만한 점포가 얼마나 거세게 왜색바람을 일으키는지! 그것을 직접 맞는 이들이 달성회 회원 같은 젊은 한인 상인들이 아닌가.
물론 달성회가 대구의 젊은 소상인들을 대표하진 않았다. 벌써 많은 상인들은 일인들의 자잘한 수입 상품이나 그들의 군용 물자를 헐값에 사들여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 이와 성격이 다르지만 광문사도 대구의 노장 상인들과 지식인들을 모두 규합한 것은 아니다. 북장대 건너편에 있는 우현서루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대구 광학회'와 어느 정도 대립관계에 있었다.
"오돌매 형, 27일에 이와세 상점에 불을 지른다고 칩시다. 성공을 하더라도 도시는 쑥대밭이 될 거요. 이와세 상점과 다닥다닥 붙은 왜놈 판자집들이, 바싹 말라있으니 금방 옮겨 붙을 테죠. 여간 난리가 아닐 거요. 광문사는 문회고 뭐고 엉망이 될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 거야."
"난 열흘 전에 서석림과 낙동강 배를 타고 동래에 다녀왔소. 짐작이지만 이번 일은 전과 다른 것 같소. 사흘 동안 함께 다녀본 내 느낌이 그래요. 엄청난 구름이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광풍이 몰아칠지 몰라요. 이와세 상점에 불을 질러도 불아궁이가 되지만 우리가 앞서 일을 치르기에는 지금 도모하는 광문사의 사업이 너무 크고 중대한 것 같소."
지하실은 음습한 침묵이 감돌았다. 숨이 막힐 즈음 오돌매의 말이 떨어졌다.
"좋소. 한번만 더 연기해주지. 하지만, 자꾸 늦추면 우리 비밀이 샐 수 있단 걸 알아야 해."
오돌매는 죽음과 삶의 권한을 가진 마왕이라도 되듯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연기를 허락했다.
광문사 문회가 방해받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계승의 가슴에 벅차게 피어올랐다. 그 기쁨으로 어둠 속에서 오돌매의 얼굴이 마치 눈에 보이는 환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자신의 진정한 기쁨이 정말 광문사 행사 때문인지, 아니면 방화자로 발각되어 자신이 처형당할 거라는 공포심에서 헤어났기 때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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