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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글쟁이의 영화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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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일
박남일

'애수'(Waterloo Bridge, 1940).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김승옥 '무진 기행') 2차대전의 소용돌이 속, 손지갑을 인연으로 파안(破顔)이 트레이드마크인 한 장교를 만나고, 젖빛 가스등을 인 채 군인들에게 웃음을 팔고, 부나비인 양 군 트럭 전조등 불빛 속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간 그녀.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하 많은 여성들의 아이섀도 칠한 눈을 망가뜨렸다던가. 로이(로버트 테일러)와 마이러(비비안 리)의 첫 번째와 마지막 만남 때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 은은히 흐르는 이 영화는 '운명'이란 낱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마이러의 운명은 '테스'(Tess)의 그것과 빼쏘았다.

타의에 의한 과거 고백으로 소박맞고 자포자기한 채 첫 사내에게 돌아가자 뒤늦게 다시 나타난 남편, 솟구치는 격정에 동거남을 죽이고 처형대에 서는 테스. 마이러인들 나을 게 무어랴. 결혼식이 예정된 날 부대 복귀가 명해지지 않았다면, 전사자 명단이 그릇되지 않았다면, 그 신문을 예비 시어머니에게 보였더라면 그녀가 논다니는 되지 않았을 것을. 정인(情人)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더라면 '슬픔의 강'(Acheron)을 건너지는 않았을 것을. 이 밤, 워털루 다리를 적시는 촉촉한 입김들(안개)은 그녀의 것일까.

'칠 년 만의 외출'(The Seven Year Itch, 1955).

선학(仙鶴)이 나래 펴듯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들춰지던 금발 미인(메릴린 먼로)의 플레어스커트(flared skirt)가 트레이드마크인 영화. '칠 년 만의 외출'이란 '결혼한 지 칠 년 된 남자가 바람피울 확률이 가장 높음'을 뜻하는 용어라나. 일곱 해 만에 처자를 휴가 보내고 혼자 남은 출판사 편집인 리처드(톰 이웰)는 착하고 소심하며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러나 직장 동료, 간호사, 아내 친구가 갈마들며 들러붙는 상상은 차라리 과대망상이라 할 것이다.

또한 가학성의 이면에 피학성이 잠재하듯(S. 프로이드), 과대망상은 피해망상에 가까운 증세를 동반한다. 피서지에서 조우한 친구와 아내가 포옹하고, 피아노 의자에서 떨어져 함께 나뒹굴었던 2층 모델 아가씨가 티브이에서 까발리고, 야죽거리는 아내의 권총에 맞아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바람피울 절호의 기회에서 잠자리까지 내주면서도 아가씨의 새끼발톱 하나 건들지 않은 그. 결혼 칠 주년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는 가뜬한 마음으로 해변의 가족에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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