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아토믹 블론드

걸 크러시版 007

'존 윅' 시리즈를 만든 데이빗 레이치 감독이 '매드맥스'의 새로운 액션 헤로인으로 우뚝 선 샤를리즈 테론을 기용하여 만든 스파이 영화로, 해외에서는 "여성판 007의 탄생"이라고 입을 모았다. 과연 제임스 본드 못지않은 강력한 능력과 매력으로 똘똘 뭉친 여성 스파이 로레인의 탄생을 흥분하고 지켜보게 된다.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이 모두 매력적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바로 전 1989년 11월에 사건이 벌어진다. 이 시기는 서독, 동독,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들이 일대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베를린은 이 힘들이 각축을 벌이는 격전장이었다. 비밀경찰들이 활개치는 동베를린 거리의 황량함과 자유주의 서양의 대중문화들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이 형성한 하위문화가 활발했던 밤거리가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당시의 문화적 분위기를 바로 알아챌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팝 음악의 활용이다. 영화는 뉴 오더, 디페시 모드, 퀸, 데이비드 보위, 카니예 웨스트 등 시대를 아우르는 팝 클래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1980년대 말 전환기적 분위기를 제대로 구현한다.

'스파이 전쟁'이란 냉전시대의 산물인 바, 냉전시대 최고의 시리즈는 '007 영화'였다. 현대에서 스파이 영화는 국가 간의 첩보전보다는 개인을 희생시키는 집단에 대한 의문, 효용이 끝난 후 스파이를 대하는 정부기관의 비정함, 주어진 임무에 대한 주인공의 갈등 등 공적 임무와 사적 활동의 충돌과 가치관의 변화를 다루곤 한다. 그러니 국가의 명운을 건 첩보전을 수행하는 스파이를 제대로 보여주도록 이 영화는 냉전 끝 무렵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2012년 출간된 그래픽 노블 '콜디스트 시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세계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이 한창인 냉전시대 베를린을 주무대로 영국 MI6와 소련 KGB, 미국 CIA, 프랑스 DGSE, 동독 비밀경찰 등 전 세계 스파이들이 자국의 목적을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치열한 스파이 전쟁을 긴장감 있게 그린다.

1980년대 후반 베를린에서는 영국 M16 요원을 살해하고, 핵폭탄급 정보를 담은 전 세계 스파이 명단을 훔쳐 달아난 이중 스파이를 잡기 위해 M16 최고의 요원 로레인(샤를리즈 테론)이 급파된다. 리스트를 회수하려고, 베를린에 10년 동안 있었던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데이빗 퍼시벌(제임스 맥어보이)은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 로레인은 그를 감시하는 프랑스 신참 스파이 델핀 라살(소피아 부텔라)에 강렬하게 끌린다. 각국의 스파이들은 명단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고, 로레인은 동독과 서독을 오가며 소련 스파이들과 싸우며 미션을 수행한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음모 때문에 정체가 밝혀져 목숨까지 위협받게 되고, 마침내 1989년 11월 1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하루 전날 결전의 밤을 맞이하게 된다.

액션과 스타일이 볼거리를 충분히 만족시킨다. 요란했던 1980년대 대중문화의 분위기가 형광 색감의 스크린 위로 묻어나고, 폭발적인 록 음악 사운드를 둘러싸고 등장하는 스타일리시한 패션의 스파이와 이들이 온몸으로 싸우는 세련된 액션 디자인은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향연만이 아니다. 영화는 냉전시대와 화해 시대의 사이에 놓인 스파이들의 생존 전략, 배신과 배신의 향연, 쫓고 쫓기는 상황, 뒤집고 뒤집히는 관계 등 여러 차례의 전환적 사건으로 혼란스럽지만 에너지가 넘치던 그 시대를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영화는 한 편 전체가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무를 다하지 못한 로레인이 M16 국장과 CIA 국장 앞에서 자신의 임무 수행 실패에 대해 자백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미스터리한 주인공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고백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플래시백을 따라간다. 영화는 영리하게 관객을 거대한 게임으로 유인하며 마지막까지 모호한 정체는 영화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한다.

걸 크러시가 뭔지를 보여주는 주인공은 로맨스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법이 없고, 단련된 몸으로 남들을 압도하며 프로답게 일을 수행한다. 성별 역할을 바꾸는 젠더 스와핑 시대의 대표적인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 역시 강대국 영화들이 최근 보수주의로 회귀하는 정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프닝의 미국 전 대통령 레이건의 평화를 위한 연설은 결론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베를린의 기묘한 황량함, 화려한 대중문화와 젊은이들, 회고적으로 냉전시대를 바라보는 시점, 일촉즉발 스파이전의 긴장감 등 많은 오락적 요소들이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흥미진진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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