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드에 이선희가 서 있다. 코가 유독 빨개 보이는 김유동이 타석에 들어섰다. 코가 빨개 '술 마신 거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 믿고 싶었던 거 같다. 그러나 빨간 코의 김유동은 9회 2사 만루에서 이선희의 초구를 담장 너머로 날려버렸다. 만루홈런. 이선희는 쪼그리고 앉았다. 경기장이 왜 이리 어두운지 모르겠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경기는 끝났다. 프로야구 원년 한국시리즈도 그렇게 끝났다.
가슴이 조여왔다.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우승을 놓친 안타까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슴이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괴로울까', 이선희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35년 전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1982년 삼성 라이온즈와 OB 베어스의 프로야구 원년 한국시리즈 6차전 경기다.
삼성 야구에 대한 기억은 꽤 많다. 대구시민야구장에서 다른 관중들과 함께 '만~수 바~보'를 외치는 재미도 쏠쏠했고, 사인을 받기 위해 장태수 일행을 쫓아가다 사인은커녕 야단에다 꿀밤까지 맞은 뒤 장태수를 좋아하지 않게 된 기억도 있다.
야구 스티커 북에도 열광했었다. 학교 앞 자그마한 문방구를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프로야구 출범 직후 유행했던, 야구선수들의 사진을 붙이는 스티커 북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죽을 고생을 해서 모으고 모았다. 열심히 바꾸고 얻기도 했다. 선수 한두 명만 더 붙이면 완성이고, 그럼 선물을 받을 수 있는데, 그 선수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의 이승엽 카드처럼 말이다.
당시 내 나이와 비슷한 지금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그 또래 친구들도 야구라면 환장한다. 지네들끼리 도시철도를 타고 '라팍' 가서 야구를 보고 오는 것도 예사로 한다. 여름방학 내내 홈경기만 열리면 '라팍'을 찾았다. 삼성 선수 카드를 받기 위해서다. 한 번에 한 장만 받을 수 있지만 어떤 친구는 수백 장을 모았다. 4명 합해 600장을 모은 이들도 있단다. 부지런히 야구장을 찾기도 했지만 관중석을 돌아다니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 받아낸 덕분이라고 했다.
이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이 카드도 그렇다. 안 나오는 선수는 정말 구하기 힘들다. 그 한두 장의 없는 카드를 혹시 운 좋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개학 전날까지 야구장으로 향했다. 대표적인 게 이승엽 카드다. 아이들 사이에 '이승엽 카드 받을 확률은 150분의 1'이라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카드를 만들 때 일부러 그 비율로 찍어냈다고 누군가에게 들었단다. 삼성 선수 카드 덕분에 이들은 설레고 신나는 방학을 보냈다.
이는 성적에 앞서 삼성이라는 팀과 선수들에 대한 애정이 크기 때문에 가능하다. 새로운 선수가 등장할 때마다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얻어 아는 척하기 바쁘다. 올해 유독 많이 선보인 처음 보는 선수들의 등장과 활약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정말 삼성을 좋아하는 거 같다. 거의 꼴찌나 다름없는 성적에도 꾸준히 야구장을 찾고, 또 지는 경기에서도 야구 자체를 즐기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린 시절의 나도 좋아했고, 지금의 아이들도 삼성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마냥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케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선수 카드, 피규어 등 마케팅엔 성공했지만 팀 성적이 계속 꼴찌를 맴돈다면 마음이 떠날 수 있다. 실제 아들 친구들 중에 이탈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찬종이는 기아, 찬홍이는 넥센으로 돌아섰다. 환주도 넥센으로 갈아타려다 그래도 지역팀이라 좀 더 좋아하기로 했단다.
삼성 라이온즈에게 내년이 중요한 이유다. 이미 올해 농사는 끝이 났다. 연속 9등, 사실상 2년 연속 꼴찌다. '최강 삼성'이 하루아침에 '꼴찌 삼성'이 됐지만 그래도 열심히 응원하고 좋아해 주는 어린 팬들을 위해서라도 이 성적은 안 된다. 올해 정말 많은 신인 등 새로운 선수를 봤다. 내년엔 좋은 성적을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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