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들이 하늘을 누비고 있다. 정월보름이 가까웠나 보다. 첨성대 옆 행사장 빈터에 연을 날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연들은 장사꾼들이 파는 것을 즉석에서 사서 날리는 것이라 모양이 한결같고 색달리 개성 있는 것이 없다. 거의 매나 공작 등 새 모양인데 인쇄하여 찍어낸 것이라 더 기품이 없다. 실까지 짧아 겨우 삼, 사십 미터가 고작이다. 더구나 방패연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 허전한 맘을 금할 수 없다. 연이라면 단연 방패연이다. 늠름하면서 재빠르고 방향을 맘대로 바꿀 수 있다. 그리하여 방패연끼리의 싸움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호기로운 진풍경 일 것이다.
장쾌하고 호방한 연싸움은 그대로의 재미이지만, 한편으로는 한쪽이 떨어져 나가며 빚어내는 순간적인 허무함과 쓸쓸함 같은 그런 연민이 일순 마음을 차지하기도 한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영주동 고개 위에 있었다. 고개 위라 바람이 강하고 앞이 틔어 걸릴 것이 없으니 연 날리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겨울에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연을 많이 날렸다. 아이들은 대개 가오리연을 날렸고 어른들은 방패연을 날렸다. 각양으로 치장을 하고 긴 꼬리를 늘어뜨린 채 간들간들 몸을 흔드는 가오리연은 재롱스런 여자아이 같았고 의젓한 품새를 자랑하는 방패연은 헌헌장부 같았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겨울 하늘을 지배하는 연의 황제가 있었다. 머리를 기르고 있었으니 분명 어른이었을 텐데 어느 정도의 나이인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연실부터 남과 달랐다. 다른 사람들의 실은 대개 흰색인데 그의 실은 언제나 국방색실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입수했는지 알 수 없지만 실타래도 엄청 굵었다. 보통의 실타래에 비해 두, 세배는 되었지 싶다. 연싸움에서 실은 매듭이 있어선 안 되고 길이가 길수록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는 먼저 실에 사를 먹였다. 사를 먹일 때는 동네 아이들 몇이 함께 거들었다. 먼저 밀가루로 풀을 끓이고 구래풀(아교)를 뜨거운 물에 녹여 미음처럼 흐늘해지면 풀에 함께 섞고 정성껏 빻은 유리가루를 탔다. 유리가루는 싸움에 절대적인 무기가 되므로 유리를 빻을 때의 정성은 대단하였다. 다음은 실의 끝을 칫솔 손잡이의 구멍에 끼우고 실을 풀에 담가 잘 저어면서 이쪽 자새(얼레)에서 저쪽 자새로 감기를 두어 번 반복하였다. 끝으로 사를 먹인 실을 말려야 했는데 그 일에는 동네 아이들 몇 명이 동원되었다. 아이들을 멀찍이 떨어지게 세워두고 등 뒤로 왔다 갔다 하며 실을 감아 말렸다. 실이 다 마를 때까지는 꼼짝도 못하고 서 있어야 했는데 아이들은 즐겨 그 일을 자청하곤 하였다.
그렇게 사를 먹인 그의 연실은 천하무적이었다. 다른 연들이 하늘에 날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슬그머니 집에서 연을 들고 나와 띄워 올렸다. 어느 정도 높이에 오르면 그의 사냥은 시작되었다. 가오리연은 거들떠보지 않고 오로지 방패연만을 노렸다. 그의 연 다루는 기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연줄을 빨리 감아올려 연이 솟구치면 자새를 앞으로 획 돌려 탱금을 먹여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몇 차례 탱금을 먹여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히면 잽싸게 연 줄을 감아 목표로 하는 연을 향해 몰아갔다. 마치 먹이를 덮치는 매 같았다. 그가 점찍은 연은 영락없이 그의 밥이 되었다. 실이 얽히는가 싶으면 가위로 삭둑 끊는 듯 승부는 순식간에 결정되고 말았다. 꼭 안량, 문추를 목 베던 관우 같았다. 팔랑팔랑 떨어져 나가는 연을 보며 그는 입꼬리에 찐득한 웃음을 흘리며 다음 사냥감을 향해 달려 나갔다.
연 몇 개가 그의 표적이 되어 떨어져 나가면 나머지 연들은 꼬리를 내리고 줄행랑을 쳤다. 방패연들이 사라진 하늘에는 그의 연만 유유히 휘젓고 다녔다. 아래에서 재롱떠는 가오리연들 위에서 그 연은 마치 시녀들을 거느린 황제 같았다. 구경하고 있던 동네사람들도 환호하고 박수를 보내며 황제를 칭송하였다. 그의 방패연 사냥은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하늘이 오로지 자기만의 것인 양 다른 방패연이 뜨는 것을 보고 있지를 못했다. 하늘이 평정된 듯했다.
그렇게 하늘이 평정된 듯한 며칠 뒤, 저쪽 동네에서 방패연 몇 개가 떠올랐다. 그 것을 본 그는 연을 띄워 다시 정벌에 나섰다. 그의 연이 다가가자 연들이 황급히 달아났다. 그런데 그 중에 연 하나가 태연히 버티고 있었다. 오히려 이쪽을 덮치려 하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동작이다. 복수의 칼을 갈고 나온 게 분명해 보였다. 저쪽의 연 다루는 기술이 보통이 아님을 알아차린 그는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볼만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연싸움에서는 실이 위로 올라타는 것이 단연 유리하다. 둘은 서로 위에 실을 올리기 위해 연을 이리 몰고 저리 피하며 갖은 곡예를 다 부렸다. 한쪽에서 잡으러 오면 아래로 곤두박질하여 옆으로 피하여 달아나고, 달아나다간 다시 솟구쳐 상대를 덮쳐갔다. 장비와 마초가 그렇게 백합을 겨뤘으리라.
마침내 줄이 얽혔다. 어느 쪽이 위로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줄이 얽히면 빨리 풀어야 한다. 차르르르 자새에서 줄이 풀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구경꾼들도 마른 침을 삼키며 손에 땀을 쥐었다. 승부는 여느 때처럼 금방나지 않았다. 저쪽에서도 어지간히 벼루고 별러 준비를 한 모양이다. 두 연은 점점 멀어지며 엽서만 하게 작아져 갔다. 더욱 아득히 멀어져 연이 우표딱지만 보일 때 한 연이 팔랑 가을날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구경꾼들 입에서 아~하는 엷은 탄식이 나오고 그의 연줄이 힘없이 아래로 쳐졌다. 졌다. 황제가 졌다.
그의 연은 하롱하롱 손을 흔들어 이별을 고하며 가마득히 사라져 갔다. 그는 연줄을 거둬들이며 멀어져 가는 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객선 갑판에서 손수건을 흔들며 멀리멀리 사라져 가는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이 저러할 것이다. 애련한 결별이었다. 그 때 그도 알았으리라. 그에게 연줄이 끊겼던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그 감정들을. 그 뒤로 그가 연을 날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대신 많은 방패연들이 떠올라 싸움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 얼마 후에 나는 죽을 번한 사고를 당하고 겨우 살아난 큰일도 있었으나 어릴 적 내 기억의 처음으로는 언제나 그 연이 떠오른다. 이때껏 살아오며 내 가슴을 아프고 저리게 했던 몇 번의 이별-몇 년 동안 고통 속에서 방황해야 했던 첫사랑과의 쓰라린 이별, 어머니의 쓸쓸한 죽음 등-을 맞으며 그 연이 멀리 사라져가며 보내던 애틋한 이별의 손짓을 다시 생각해 내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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