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찍히지' 않을 권리

'슬리버'(Sliver)란 영화가 있다. 1993년 샤론 스톤과 윌리엄 볼드윈이 주연으로 나섰던 에로틱 스릴러물이다. 전작 '원초적 본능'으로 스타덤에 오른 샤론 스톤의 섹시미를 내세웠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

썩 재미도 없던 범작을 아직도 기억하는 건 여러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관음증(觀淫症) 환자인 고급 아파트 건물 주인이 모든 아파트 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몰카'로 낱낱이 들여다본다는 설정이 경악스러웠다. 온 벽면을 가득 채운 CCTV마다 나오는 입주민들의 적나라한 모습은 잊지 못할 몽타주(montage)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은 20여 년 만에 현실이 됐다. 흔히 '몰카'로 부르는 불법촬영 범죄가 급증한 탓이다. 타인의 은밀한 속살에 재미를 느끼는 데 대한민국이 중독된 형국이다.

긴 추석 연휴 기간에 눈길을 끈 기사 역시 불법촬영 범죄와 관련된 것이었다. 최근 5년 사이 남성 몰카 피해자가 많이 늘어났다는 경찰청 통계다. 2012년 53건에서 2013년 95건, 2014년 172건, 2015년 120건, 지난해 160건 등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올챙이 몸매가 부끄러울 뿐인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괴이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남을 함부로 '찍는' 못된 버릇이 또 하나 있어 안타깝다. 원시 인류부터 전해온 자연스러운 본능일지도 모르겠지만 편 가르기다. 조선은 당파를 이뤄 내부 갈등에만 골몰하고 단결하지 못한다는 일제의 '당파성론'(黨派性論)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정부는 임기 시작부터 '적폐 청산'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추석 연휴를 마치고 복귀한 문재인 대통령의 일성에 담긴 화두 또한 '적폐 청산'이었다. 문 대통령은 10일 "적폐 청산은 사정이 아니라 권력기관과 경제, 사회 등 전 분야에 누적돼 온 관행을 혁신해 나라다운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집권 여당만이 정의롭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아전인수가 아닌가 싶다. 친문(親文)으로 알려진 한 지식인조차 언론 인터뷰에서 "촛불집회로 갑자기 대통령이 되면서 영웅심리에 빠진 게 아닌가 한다. 내가 최선이고, 비판하는 사람은 악으로 여기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고 꼬집을 정도다.

시계를 되돌려보자.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구호 역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당시 보수당 지지층도 지금의 여당 지지층처럼 호들갑 떨기에 바빴다. '내로남불'은 정녕 온 국민이 앓는 불치병이 된 것일까?

칼자루를 쥔 측이 아무리 정치 보복이 아니라고 우겨도 '찍힌' 사람들 입에서는 독선과 불통이자 화합 대신 응징이란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국민들로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공부를 새로 해야 할 판이다. 달콤한 연휴에 묻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국군의 날과 개천절은 도대체 언제로 정해야 하나?

역사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덧붙이자. 이미 300만 명이 넘게 봤다는 영화 '남한산성'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은 뒤 청나라는 흔히 삼전도비(三田渡碑)로 부르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설치를 요구했다.

이 비문을 썼던 이는 훗날 효종 때 영의정에 오른 이경석(1595~1671)이다. 물론 아무도 하지 않고 싶어 했던 일이어서 꾀 없던 그가 억지로 떠맡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 글을 가르쳤던 형, 이경직에게 보낸 편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입니다."

정말 서둘러 해소해야 할 과제는 차고 넘친다. 꼭 '찍어' 덤빈다 하더라도 시간이 모자랄 터이다. 켜켜이 쌓여온 폐단이 집권 세력의 의욕만으로 해결될 리도 만무하다. 국민 모두가 서로를 인정하고 힘을 모아야만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8개월 뒤 치를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새로운 누군가를 찍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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