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는 놀이터에서 '오징어'라는 이름의 바닥놀이를 자주 했다. 온 동네 아이들이 놀이터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큰 대형 오징어를 그려 놓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한 번도 같은 방법으로 게임을 한 적이 없었다. 덩치가 큰 두세 살이 많았던 형들은 어린 동생들이 놀이를 하겠다고 들러붙으면 몸싸움을 해야 하는 이 놀이의 성격 때문에 규칙을 바꿔야 했다. 예컨대 옷자락 붙잡기는 형들은 금지였지만 동생들에겐 반칙이 아니었다. 또 동생들은 오징어 몸통에서 두 발로 뛰어다닐 수 있었지만, 형들은 깨금발로만 다녀야 했다. 만약 형들이 동생들을 배려하지 않았다면 아마 게임은 형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배려가 꼭 동생들만을 위한 것이라 할 순 없었다. 형들 입장에서도 놀이를 더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필수적 조정이었다. 나와 내 친구들이 놀이터의 대장이 된 후에도 조금씩 규칙을 바꿨다. 여자아이들은 세 번 정도 붙잡혀야 술래가 되었다. 화상을 입어 다리가 불편했던 친구는 깨금발로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공평하진 않아도 공정했다.
나도 형들처럼 야구를 시작하고, 축구를 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을 때에도 '원래의 규칙'대로 한 적이 없었다. 운동장에 선을 그을 수 없었기에 라인 아웃도 없었고, 공이 골대 뒤로 넘어가도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축구라기보다 아이스하키 규칙에 더 가까웠다. 야구도 마찬가지였다. 다칠 위험이 있어 도루는 언제나 금지였다. 안타를 쳐서 공을 담장까지 날려 보내도 2루까지만 갈 수 있었다. 공을 단번에 3루나 홈까지 던질 만큼 어깨가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규칙이란 우리가 자유롭게 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일단 정해지면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라는 역설에 그 본질이 있다. 하지만 학칙을 따르고, 법을 따르고, 조직 생활을 해오며 어릴 때와는 달리 규칙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는 전망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만사가 정해진 규칙대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조차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규칙이 되었다.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학교에 진학해야 하고, 직장에 취업하면 이성을 만나 결혼을 해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고, 적당한 때에 집을 마련하고 차를 사야 한다는 규칙.
나는 수능일도 엄중한 것이라 바꿀 수 없는 규칙인 줄만 알았다. 바꿀 수 없는 규칙이 바뀌는 것을 보며 들뢰즈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일반적인 공식이나 변경할 수 없는 규칙이란 없다'. 우리에게는 규칙을 따르는 능력뿐 아니라 규칙을 바꾸는 능력도 있으니까. 규칙은 '지진'이 아니라 '우리'가 바꾸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능력이 게임을 더 재미있게, 삶을 더 자유롭게, 사회를 더 공정하게 만들어주는 것일 테니까. 그렇다. 규칙은 따르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필요하면 바꾸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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