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접해 있지 않기에 내륙도시의 정체성만 가진 듯한 대구는 실은 내륙수변도시(친수도시)의 기억을 갖고 있다. 금호강에 버스정류장만큼 많았던 '나루'의 역사가 대표적이다. 대구 시내를 관통하는 금호강 곳곳에 현재 이름과 위치가 전해지는 나루터가 14곳쯤 된다. 최근 대구시'대구경북연구원은 금호강 및 그 유역을 글로벌 내륙수변공간으로 조성하는 방안인 '금호강 그랜드 플랜(안)'을 제시했다. 한마디로 금호강을 북적이게 만들겠다는 얘기다. 금호강 유역 곳곳에 뱃길 네트워크를 형성해 대구로 사람과 물자를 모았던 나루의 역사를 계승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교통, 관광, 레저 등을 위한 뱃길 부활의 힌트로도 삼을 수 있다.
◆금호강 나루터는 지금도 대구 교통 요충지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4월 한 신문이 연재한 '남조선일주기' 기사에는 금호강의 한 나루가 등장한다. 기사 속 일행은 경성(서울)을 출발해 계속 남쪽으로 향한다. '왜관 인근 낙동강 나루'를 건넌 이들은 달성군 다사면 죽곡동(현 다사읍 죽곡리)의 '금호강 나루'에 다다른다. 이곳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나루의 모래언덕 맞은편은 벼랑이다. 벼랑 중턱에 이락정이라는 낡은 정자가 있다. 이 일대에서는 물고기가 잘 잡힌다. 후리그물(여기서는 깍구리그물이라고 한다)을 끌어올리면 팔뚝만 한 잉어와 붕어가 가득 잡힌다. 한 마리에 얼마인지 현지 주민에게 물었더니 오십전이라고 했다.'
이곳은 바로 금호강 서편 강창나루 일대다. 강창은 조선시대부터 현물로 징수되던 조세곡을 모아둔 창고다. 강가의 창고라서 강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같은 단순한 작명은 구미'상주'왜관 등의 강창 및 강창나루에도 적용됐다. 아무튼 이 나루는 금호강 서편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와 동편 달서구(당시 성서면) 파호동을 이었다. 조선시대 때부터 강창을 매개로 사람과 물류가 많이 드나든데다, 작은 나룻배가 오가던 것이 행인이 늘고 버스가 개통하면서 버스를 실은 큰 배(철선)가 다닐 정도가 됐다. 이러한 많은 유동 인구와 강창 일대에서 유독 잘 잡히는 물고기의 결합은 일대에 '강창매운탕'을 파는 매운탕집의 문전성시도 발생시켰다.
강창나루의 수상교통과 강창교의 육상교통은 단절되지 않고 연결됐다. 교통 수요가 증가해 왕복 10차로로 확장된 강창교는 현재 대구와 서쪽 구미'김천'성주'고령'칠곡 등 인접 시'군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량이다. 이 교량은 대구 시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달구벌대로의 서편 요충지이기도 하다.
나루는 교통 요충지가 될 만한 곳에 앞서 자리 잡았고, 그 기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다른 나루터를 봐도 알 수 있다. 금호나루가 있던 곳에는 금호대교가 있다. 금호대교는 경부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가 만나는 금호JC의 기반 교량이다. 또한 경부고속도로의 교량인 금호1교가 동변나루, 금호2교는 검단나루가 있던 곳을 지난다. 산격대교는 무태나루가 존재한 곳에 세워졌으며, 팔달교 역시 팔달나루(팔달진)의 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크지 않은 교량이라 하더라도 해랑교(해랑개나루), 노곡교(노곡나루), 조야교(조야나루) 등으로 이름까지 담아 같은 맥락의 교통시설로 역사를 잇고 있다. 교통시설이 아니더라도 금호강 서쪽 맨끝 나루였던 강정나루의 경우 강정고령보에 이름을 전수했다. 그리고 강정나루 자리에는 물문화관 '디아크'가 들어섰다.
◆대구를 일으킨 금호강 나루
금호강 곳곳 나루가 단순히 교통 기능만 수행한 것은 아니다. 사람과 물류를 금호강으로 모아 오늘날 대도시 대구의 기반을 조성한 데 의미가 있다. 대표적으로 대구 약령시 역사가 금호강 나루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각종 약재를 전라도와 충청도 등으로 운송하는 데 낙동강'금호강 수운이 요긴하게 쓰였다. 대구는 물론 주변 경상도 지역 곳곳에서 생산된 다양한 약재가 대구 약령시에 집산됐다. 대동법 시행에 따라 민수'관수'교역용 약재 모두 꼭 시장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약재를 실은 배가 운항한 수로의 길이로 보면 낙동강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금호강에는 배를 대고 대구로 출입하는 통로인 나루가 있었다는 점에서 또한 의미 있다. 금호강 나루에서 대구읍성 안 경상감영까지 사람과 물자가 분주히 오갔다. 당시 대구 약령시는 지금의 대구 중구 남성로 약전골목이 아닌 좀 더 북쪽 경상감영 객사 앞 일대에서 열렸다. 약령시가 지금의 약전골목에서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07년 이후다.
대구 약령시는 전국 약령시들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약재상은 물론이고 금융과 숙박 등 지원 업종 종사자들도 끌어들여 대구를 늘 북적이게 만들었다. 조선 3대 시장으로 불린 서문시장과 함께 대구를 전국구 상업도시로 성장시킨 동력이자 상징이다. 그 바탕을 살펴보면 한양과 대구를 이은 육로인 영남대로 못잖게 수로인 금호강'낙동강이 꽤나 지분을 차지한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영남대로를 이용해 대구로 들어오고 또 나가려면 반드시 금호강을 건너야 했고, 그러기 위해 나루에서 배를 타야 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학자 서거정의 대구 10경 가운데 하나인 '노원송객'(노원에서의 송별)이 대표적인 흔적이다. 여기서 가리키는 나루는 팔달나루(팔달진)다. 대구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의 첫 나루인 까닭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주막촌이 인접한 대구 북구 노원'원대 지역에 있었다.
◆수로가 지닌 생활'관광'레저 가능성
금호강 서편 끝에서 조금 떨어진 낙동강 사문진 나루터는 사문진교(교통). 주막촌'화원동산(관광), 100대 피아노 콘서트(문화) 등 사문진 나루의 역사를 다채로운 모습으로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유람선을 운영하며 과거 뱃길 복원도 꾀하고 있다.
금호강 나루터에도 이 같은 방향으로 꾸미려는 발상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서거정이 언급한 대구 10경의 '금호범주'(금호강의 뱃놀이)가 발상의 주요 근거다. 최근 대구시'대구경북연구원이 발표한 '금호강 그랜드 플랜(안)'에서는 금호강 접근성 개선'유역 문화산업 육성'하천 경관 창출 등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보행, 자전거, 트램 등과 함께 뱃길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해외 친수공간 재생 사례를 살펴보면 수로는 주민 생활과 밀접한 공간이다. 오염과 침수 같은 문제를 확실히 극복한 다음에는 수로를 주민 생활의 일부로 돌려주는 맥락이 엿보인다.
일본 후쿠오카현 야나가와시 '야나가와 수로'의 경우 상수'하수도 등 관련 시설을 지속적으로 확충하면서 수로 재생에 주민의 관심을 모았다. 1999년에는 '물의 헌법'(야나가와시 수로를 지키며 키워가는 조례) 시행에까지 이르렀다. 이 헌법에는 주민을 위한 친수공간 확보와 환경교육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면서 야나가와 수로는 주민 생활을 특색 있게 만드는 것은 물론 뱃놀이 명소로 자리매김하는 등 관광'레저 기능도 갖추게 됐다. 500여 년 전인 나라시대에 조성돼 역사성까지 갖춘 총길이 930㎞ 야나가와 수로에는 연 100만 명이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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