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장진호 전투와 자유민주주의

장진호 전투는 6·25전쟁 중 가장 처절한 전투였다. 그 처참하기가 근대 세계전쟁사에서 세 번째 안에 손꼽힌다.

6·25는 소련 중공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일으켰다. 애초에 김일성은 남한을 침공, 공산주의 통일을 하겠다는 야심을 설계했다. 그 실천으로 남한에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확장 무장봉기시켜 혼란을 조성하고, 소련의 대대적인 군사원조에 힘입어 최정예 인민군 20만 명을 편성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세계 최우수 전차로 일본이 자랑하는 무적 관동군을 단숨에 격파 지리멸렬케 한, 소련의 T-34 전차 242대를 보유함으로써 남침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

"대포만 몇 발 발사해도 남한의 남로당 봉기군에 의해 공산 통일이 된다"고 하는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설득에 결심을 굳힌 김일성은 돌이킬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1, 2차 세계대전보다 더 처참했던 6·25전쟁을 일으켰다. 초전에는 그의 예측대로 파죽지세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고, 유엔군의 오산·대전 방어선을 단숨에 뚫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학도의용군과 경찰까지 전투에 나가고, 지게에 보급품을 져 날라 군의 사기를 올린 대구시민의 애국심이 하나로 뭉쳐 인민군 최정예 3개 사단의 결사적인 공격을 물리쳤다. 그 유명한 다부동 전투다.

김일성이 수안보까지 내려와 독전한 이 전투는 그야말로 유학산을 뺏고, 뺏기는 피투성이의 지옥 같은 혈전이었다. 날마다 늘어나는 전사자를 줄이기 위해, 유엔군이 B-29 99대로 융단폭격(Carpet Bombing)을 하여 인민군을 궤멸시켰다. 한편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국군과 유엔군이 패잔병을 소탕하며 압록강 초산까지 올라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다. 북진통일을 바로 눈앞에 둔 시점에서 장진호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때 선전포고도 없이 15개 사단의 중공군이 유엔군을 포위했다. 중공군은 월등한 군사력으로 우회하여 퇴로를 막고 포위 공격하여 적을 패주시키는 것이 주 전술이었다. 1950년 11월 27일, 영하 30℃의 개마고원 혹한 속에 포위된 미 해병 8천 명의 퇴로는 '덕동 통로' 고갯길 하나뿐이었다. 위기를 느낀 미 해병1사단은 미국이 자랑하는 해병 폭스 중대를 투입, 중공군 3개 대대와 8일간의 처절한 격전을 치른다. 이것이 혹한 속에 17일간 치른 '장진호 전투'이다.

전투 중에 체감온도가 영하 50도까지 내려간 살인적인 추위를 견디며, 중공군 3개 대대를 섬멸하여 이끈 승리로 8천여 명의 미 해병은 무사히 사단본부 하갈우리로 물러났다. 폭스 중대가 하갈우리 사단본부에 이르니 중대원 247명 중 60명이 살아 남았고, 이들마저 모두 중증 동상에 걸려 있었다. 하갈우리의 이 병력이 그 뒤 국군 수도사단 및 제3사단과 유엔군 10만 명과, 피란민 14만 명의 역사적인 흥남 철수작전을 성공케 하였다. 기네스북에도 오른, 피란민 1만4천 명을 태운 메르디스 빅토리아호가 그 마지막 철수였다. 그야말로 목 놓아 울고 피눈물 흘린 감동적인 철수였다.

살아 남은 폭스 중대원들은 한결같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장진호에서 싸우고, 죽어갔다'고 독백했다. 이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미 해군순양함을 '장진호'로 명명 진수했고, 알래스카에 기념공원, 미 국립해병대박물관에 장진호 전투 기념관을 건립했다. 우리는 먼 이국땅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해병 폭스 중대원들에 감사하며, 어떠한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유민주주의를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