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아, 유학산 

박시윤
박시윤

산하가 푸르다. 꽃 진 자리가 푸르고, 들녘을 지나는 바람도,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도 푸르다. 동서남북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람이 가뿐히 능선을 내려와 골짜기 스치고, 청년의 이마를 스치고, 어느 즈음에 걸려 있는 태극기를 스친다. 창공에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일 때, 비로소 이 땅의 6월은 시작된다.

6월은 그런 달이다. 푸르러서 눈이 부시고, 푸르러서 슬픈 계절이다. 6월의 산하를 대하노라면 사방 천지에 이름들이 나부끼고, 이름들 사이로 무명의 까마득한 얼굴들이 스치운다.

그것은 꼭 가사 없는 노래 같기도 하고, 그것은 꼭 슬픔을 억누르는 통곡 같기도 해서 귀를 열면 온 산하가 슬픔으로 출렁이는 것만 같다.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곳, 그러나 무수히 많은 무명들의 영혼이 살아있어서 이 땅에 자유가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곳, 피아(彼我)의 구분이 명확했던 과거와 피아의 경계가 서서히 허물어지는 현재가 공존하는 곳.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유학산 일대는 대구를 방어하는 낙동강 전선의 마지막 보루였다. 목숨을 담보한 탈환전이 밤낮으로 펼쳐졌던 328고지는 12일간 정상의 주인이 15번이나 바뀌었고, 837고지는 최대의 격전지였던 만큼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는 혈전장 속에 무려 2만7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수습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68년이 흐른 오늘, 유학산은 풀과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이루었으니, 이 숲을 누가 감히 무시로 생겨났다 하겠는가. 산화한 몸뚱어리들이 먹이고 키워낸 호국의 숲이리라. 674'793'837'939고지, 숲데미산과 328고지는 온전히 살아남아 말이 없고, 이따금씩 창공을 자유로이 비상하던 새가 낙동강을 건너와 상투바위와 쉰질바위에서 노닌다. 이쪽과 저쪽을 경계하지 않는 새들. 이 산하의 슬픔을 모를 것이다. 6월이면 나는 유학산 능선에 올라 무명에게 말을 건넨다.

'똑똑똑, 잘 계셨나요? 늦게 와서 죄송해요. 적막한 이 숲에서 외롭지 않으셨나요? 쏴아아아- 바람이 당신을 깨우네요. 가만히 눈을 감으니 속삭이는 말이 들려요. 무심히 무심히 흐르는 세월, 당신 긴 잠 안녕히 주무셨어요? 당신만큼 푸르른 6월입니다. 여기는 당신의 나라예요. 이토록 푸른 당신의 나라에서 우리는 지금, 마음껏 자유를 누립니다. 잊지 않을게요. 푸른 이름의 당신을.'

유해를 발굴하던 나무 아래서 무명의 유품들이, 그리고 발가락뼈 하나가 소리 없이 걸어 나와 화답하였다.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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